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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도 Aug 06. 2020

육아는 '흔적'을 목격하는 일이다.

아이의 저지레에 관하여.

김하나 작가님이 쓰신 <힘빼기의 기술>이라는 책에 이런 글이 나온다.


모든 고양이 집사가 알고 있듯이 고양이들은 불가사의하게도 ‘가장 그림이 되는’ 위치를 귀신같이 찾아 우아하게 정지 동작을 취해준다. 내 집은 살아 움직이는 아름다운 액자를 갖게 되었고, 그 액자는 바쁜 세상 속에서도 아랑곳 앉는 속도를 유지했다. 고양이는 인간의 시간을 지배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중략) 누군가 내게 인생에서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온 사건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반년간 남미를 여행한 일과 한 마리의 고양이를 만난 일이라고 답하겠다.


이 아름다운 글을 읽으며 나도 내게 한번 물어보았다.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온 사건은 무엇인가요? ‘애 낳고 엄마가 된 것’ 이라는 뻔한 대답이 아닌, 좀 더 멋지고 우아한 대답을 해주시길 기대해볼게요!


정말 뻔 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으므로, 질문에 아예 단서를 붙여 스스로에게 물었다.

난 남미를 반년이나 여행하지도, 고양이를 키우지도 않았지만, 이 험난한 세상을 42년이나 살아온 인생의 경력자이며, 19년째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는 (버티기)실력자인데다가, 여행도 좋아하고 취미에도 돈을 엄청 썼으며 친구도 많고 남편까지 있으니 분명 엄청 근사한 대답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거야!


이런 마음으로 계속 생각하고 또 생각해보았다. 그런데 이렇게 예외조항을 만들어 놓고 질문을 해 놓고 보니 비로소 내 인생이 선명해 지는 또 다른 목소리!


“저런. 예외 조항은 빼셔야 겠네요! 당신은 사실 뻔한 여성이거든요!”


그렇다!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변화를 말하면서 ‘아이와의 만남’을 빼놓고 생각한다는 게 어불성설이었다. 뻔한 대답 피하려다 엉뚱한 대답을 할 뻔~ 한 상황.   

김하나 작가님의 문장들을 모티브삼아 나의 대답을 만들어보았다.


모든 엄마들이 알고 있듯이 아이는 불가사의 하게도 엄마가 잠시 ‘딴 데 집중하는 순간’을 귀신같이 찾아 날렵하게 ‘자신만의 흔적’을 남겨준다. 내 집에는 살아 움직이는 액체괴물의 흔적으로 집약된 추상화들이 수시로 나타난다. 그 기괴한 추상화들은 뒷목을 잡고 폭발하는 나의 모습에도 아랑곳 않는 빈번함을 유지하고 있다. 내 삶에서 이토록 인내한 적이 있었던가? 단연코 없다. ‘아이’는 나의 깊은 빡침을 지배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누군가 내게 인생에서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온 사건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너무 뻔해 미안하지만 ‘나의 어린 아이’를 만난 일이라고 답하겠다.


어린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흔적’을 끊임없이 목격하는 일이다. 흔히 말하는 아이의 저지레들. 제 아무리 깔끔쟁이 아가씨로 살아왔다 한들 어린아이의 저지레 앞에 당해낼 재간이 없을 것이다.


아기가 태어나서 제 스스로 기어 다니기 시작한 돌 무렵부터 싱크대를 비롯하여 옷장, 서랍장, 세탁실 속에 있는 내용물을 한 번씩 깡그리 끄집어내는 건 시작에 불과하다. 손가락에 힘이 생기기 시작하면 귀신같이 제일 비싸고 보드라운 가죽들만 골라 손톱으로 긁어 스크래치의 흔적을 남기고, 색연필을 쥐기 시작하면 집안의 모든 흰색을 도화지삼아 낙서의 흔적을 남긴다. 세면대에 손이 닿을 무렵은 무조건 화장실 물난리 당첨이다.

그래도 이런 건 화가 나진 않았다. 두 세살 즈음이야 아직 어린 애라 사리분별이 없고 다칠 수 있기 때문에 혼내기 보다는 타이르고 뒷정리하기 바빴을 뿐 화가 나진 않았다.


하지만 이제 우리 아이 벌써 다섯 살.

제 의견을 나보다 더 또박또박 설명하고 그 누구보다 겁이 많아 위험해 보이는 건 건들지도 않는 아이이면서 왜 아직도 나 몰래 여기저기 ‘깜짝 놀랄만 한 흔적’ 들을 만들어 내는 건지 도통 미스테리다.


며칠 전 화장실에 들어가려고 스위치에 손을 대려는 순간 나는 또 한 번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리고 내 눈을 의심했다. 도대체 이건 무슨 흔적이지? 가만 생각해보니 좀 전에 물감놀이를 한 아이가 손 닦고 오겠다고 하더니 이런 추상화를 또 만들어 놓은 것이다!

뒤늦게 목격한 아이의 흔적.


책상쪽만 정리하던 내가 아이의 손 상태를 잠시 놓쳤던 것이다. 혹시나 해서 바닥을 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뒤늦게 발견한 아이의 흔적2.


하루에도 수없이 생성되는 아이의 놀라운 흔적들을 목격하면서 스스로에게 신기한 건, 깊은 '빡침' 와중에도 열심히 닦아내며 정리하며 나도모르게 피식, 웃어버리는 내 모습을 자주 목격한다는 거다.


주체가 확실한 난장판 앞에서도 아무런 댓가없이 내가 뒷처리를 감당한다는 것. 그리고 피식거리는 것. 이 마음은 내가 엄마가 되고 나서야 알게된 신기하고 놀라운 나의 또 다른 모습이다.


오늘은 또 내 아이의 어떤 흔적때문에 깜짝 놀라게 될까?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아이의 추상화가 유독 기다려지는 퇴근길이다...라고 하기엔 오늘 엄마가 좀 많이 피곤해. 오늘은 좀 적당히 적당히 플리즈~ 오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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