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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경 Oct 30. 2022

나를 무너뜨린 로스쿨에서의 경쟁

나는 전공이 법학도 아니고 이전에 사법고시를 준비해 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로스쿨 이전에 사법고시를 합격해서 들어가는 사법연수원의 분위기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다만 듣기로는 연수원 수료 시 그간의 시험 성적을 바탕으로 등수를 매겨 1등부터 판사, 검사, 대형 로펌의 변호사 등 좋은 직업을 차례로 골라갔었다고 하니 경쟁이 존재하기는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로스쿨의 경쟁은 수준이 다르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게 바로 유급’ 때문이다. 같은 해에 입학한 학생들 중 몇 명은 학년 말 성적에 따라 반드시 유급을 당하게끔 되어있고, 유급을 당하는 경우에는 이미 다닌 학년을 한 학년 아래 후배들과 1년 간, 다시 한 번 다니며 모든 수업을 다시 들어야만 한다. 물론 그렇게 유급한 해에 성적이 좋지 않을 경우 재유급도 가능하다. 




대학에서는 흔히 학사 평가 기준이 과목에 따라 절대평가와 상대평가로 나뉜다. 절대평가의 경우에는 교수님이 보시기에 훌륭한 답안지가 학생들 가운데에 많이 있으면 교수님이 얼마든지 A학점을 날려도 된다. 그러나 상대평가는 이러한 교수의 자율성을 배제하고 학교가 A, B 및 C 이하 학점을 학생들에게 줄 수 있는 비율을 철저히 통제하는 것이다. 


교수님 입장에서는 A학점에 해당하는 수강생이 10명일지라도 상대평가 하에서 그 수업에서 최대로 A를 부여할 수 있는 인원이 9명에 해당한다면 그들 중 어느 한 명은 B를 받을 수밖에 없다. 이 경우 학생들은 교수님의 수업을 나름대로 숙지하여 시험을 잘 보는 것에서 나아가 ‘내 옆의 수강생보다’ 시험을 더 잘 보아야 하는 상황이 된다. 


다만 대학은 상대평가가 아닌 절대평가로 평가하는 과목들도 많고, 한 과목을 수강하는 수강생의 수도 상당하다. 또한, 동일 대학, 동일 전공생이라고 하여 모두 같은 과목을 듣는 것도 아니며, 모든 수강생이 같은 정도로 학업에 열정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기에, 대단히 학업에 불성실하지 않은 이상 성적으로 유급과 같은 불이익을 당할 확률이 희박하여 이 상대평가의 폐해가 눈에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로스쿨의 경우에는 다르다. 모든 과목이 상대평가로 이루어지고, 한 학년 학생 수가 학교에 따라 적게는 40명에서 많아야 150명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그 명확한 인원 안에서 경쟁이 이루어진다. 로스쿨을 졸업하고 변호사 시험을 준비하는 데에 필요한 과목이 정해져있기 때문에 사실상 재량의 여지가 거의 없어 모두 같은 과목을 듣는다고 할 수 있다. 또 모든 로스쿨 재학생들은 동일하게, 유급을 피하고 3년 안에 졸업하며 높은 학점을 경쟁력으로 삼아 좋은 직장에 취직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공부를 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유급의 기준도 상당히 엄격하여 학업 성취가 도드라져 보이는 몇 명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가 유급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게 된다


이런 무한 경쟁 상황에서 일어나는 마음은 결국 내 옆에 앉은 재보다는 잘해야 한다이다고백한다. 1학년 헌법 수업 시간에 내 옆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졸던 친구를 일부러 깨우지 않았다. 저 친구 깨워서 수업 열심히 듣고 시험 잘 보게 하면 내 등수가 밀릴 수 있으니까. 




지금이야 서울 주요 대학에 법학과가 없어졌고 사법고시가 폐지된 지 몇 년이 지났기에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이겠지만, 내가 로스쿨에 입학한 2013년도에는 서울 상위권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사법고시도 몇 년을 준비하다가 로스쿨로 방향을 돌려 입학한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이와 같은 사람들이 거의 절반은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로스쿨 입학을 위해서는 법학 과목 수강이 필수도 아니고, 입학시험에 법 지식을 묻는 질문이 나오지도 않기에 사실상 처음 제대로 법을 공부하는 나는 저들의 경쟁상대가 될 수가 없었다. 헌법 시간에 내가 자게 두고 깨우지 않은 친구도 법학을 전공한 친구였다. 


이미 법을 공부하고 온 저들이 유급을 당할 확률은 희박할 것이고결국 저들을 제외한 절반가량의 재학생들 중 누군가는 유급을 당하게 될 텐데 그게 내가 아니라는 보장이 없었다교수님들은 수업 분위기를 어디에 맞춰야 할지 몰라 힘들어했을 것이다. 절반은 사법고시 합격 문턱까지 갔다 온 학생들도 있을 정도로 법학에 익숙한데 나머지 절반은 법학에 한해서는 완전 백지상태인지라, 교수님 수업의 난이도는 위 두 집단의 중간 어딘가 즈음에 맞추어졌겠지만, 그것만으로도 후자 그룹에 속했던 나로서는 수업이 내 수준을 한참이나 뛰어넘게 되어 수업을 쫓아가고 유급을 피하기 위해 방과 후 들여야 할 공부 량이 상당했다. 


친구에게 너의 하루 중 세 시간만 나한테 줘라제발하고 울상이 되어 말했었다매일 눈코 뜰 새 없이 공부했고 시험기간에 밤샘은 예사였다. 공부하는 것 외에 다른 어떤 일도 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없어 친구를 만날 수도, 전화 통화 할 수도 없었다. 가족같이 의지하고 지내던 언니랑 형부를 만나러 가 따뜻한 밥 한 끼 얻어먹을 수도 없었다. 이 경쟁에서 뒤쳐져 유급 당할까봐, 이 무시무시한 곳에 1년을 더 머무르게 될까봐 두려움이 턱 끝까지 차오른 채로 숨 막히게 공부만 했다. 내가 나의 최선을 다 한다고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다음부터 나는 다른 사람이 나보다 못하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다시 서핑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라인업에서 피크를 확인하고 피크에 머물러야 파도를 가장 많이 잡아탈 수 있고, 이는 필연적으로 서퍼들 간에 경쟁을 불러일으킨다는 이야기까지 했다. 


피크에서 벗어난라인업에서 파도가 깨질 기미가 잘 보이지 않는 잔잔한 구간을 어깨라는 의미의 숄더라고 부른다숄더에서는 파도가 거품으로 잘 부서지지 않고 부서지더라도 피크에서보다 훨씬 적은 힘을 내며 부서지는 까닭에 여기에서 파도에 올라타려고 해도 파도의 힘이 부족해 잘 올라 타지지 않는다. 운 좋게 올라탔다고 하더라도 피크에서부터 벌써 누군가가 파도를 타고 내려오는 중일 것이 때문에 서핑을 중단하고 파도의 주인인 그에게 파도를 양보하여야 한다.  


결국 파도를 타기 위해서는 피크 가까이로 들어가야 하는데피크 가까이에는 이미 다른 서퍼들이 자리를 잡고 파도를 기다리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있어서 마냥 쉽지만은 않다어찌 저찌 피크 부근에 자리를 잡고 있더라도, 막 파도를 타고 다시 라인업으로 돌아온 다른 서퍼가 나보다 더 피크 가까이로 들어가 파도를 기다리기 위해 자리를 잡으면 나는 피크에서 멀어지고, 그렇게 한 명, 두 명이 더 피크로 들어오면, 내 파도를 타기 이전에 숄더로 떠밀려오는 것은 금방이다. 숄더에서라도 타 보자하고 파도 잡기를 시도하지만 여의치가 않고, 금방 기운도 빠지고 기분도 떨어져서 그날 서핑은 꽝이 될 공산이 크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피크에 들어가는 것 뿐 아니라 피크에서 밀려나지 않고 피크를 지키며 좋은 자리에서 파도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주인공과 주변인의 개념에 빗대어 볼 수도 있겠다. 피크를 지키고 있는 서퍼들은 그 날 그 해변의 주인공 같이 계속해서 파도를 탈 기회를 쥐게 된다. 하지만 용기내서 서퍼들이 모여 있는 피크 가까이에 들어가거나, 계속해서 피크로 밀려들어오는 서퍼들의 행렬에도 불구하고 피크 부근을 꿋꿋이 지키고 있을 만큼 깡다구가 충분한 서퍼가 아니라면 숄더로 밀려나서 다른 사람들이 좋은 파도를 타는 것을 구경만 하는 주변인이 되어야 한다. 파도가 들어오는 해변이라면 어느 해변이나 이렇게 주인공처럼 파도를 계속해서 타는 사람과 파도가 들어오지 않는 구석에 둥둥 떠 있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로스쿨 입학 전항상 나는 내 인생의 주인공으로 살았다비록 주변의 사랑과 축복을 받는 행복한 주인공은 아니었을지라도, 거듭되는 모진 풍파로 몸과 마음이 다소 너덜너덜해졌을지라도 내 인생에 있어 나를 주인공이 아니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남과 비교하지 않았고, 내 인생을 온전히 디자인하며 원하는 능력을 내 힘으로 갖기 위해 항상 노력했다. 과정이 힘들더라도 성취감은 말할 수 없이 달았다. 


그러나 로스쿨에 입학 후, 이미 입학 당시부터 정해진 우등생인 사법고시 유경험자들 사이에서, 아무리 최선을 다해봤자 내가 얻을 수 있는 건 유급이나 면하는 것뿐이었고, 그나마도 내가 최선을 다 한다고 될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기에 내심으로는 다른 재학생들이 나보다 못하기만을 간절히 빌었으며, 이렇게 나 자신이 아닌 나의 위아래에 있는 사람들만을 바라보는 가운데 나는 점점 내 인생의 주인공 자리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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