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너 좋아하냐”라는 말도 안 되는 시청자들의 온 몸에 소름을 돋게 한 드라마 ‘상속자들’은, 내가 로스쿨에 입학한 해인 2013년도에 가을부터 겨울에 걸쳐 방영되었다. 2011년에 방영하였던 드라마 ‘시티헌터’에서 이민호의 좋은 모습을 보아서인지 꽤 큰 기대를 갖고 첫 회를 보았고, 그 후 공부하다 머리 식힐 때 한 번씩 보았더랬다. 시청률 집계표를 찾아보니 극 후반부로 갈수록 점차 시청률이 높아지는 경향을 띠는데, 나는 위 대사를 포함하여 점차 소름끼치는 전개를 견딜 수 없었는지 얼마 안 보고 중도에 하차했다.
전개도 전개이지만, 실은 내가 견딜 수 없던 것은 박신혜를 칭하던 명칭인 ‘사배자’였다. 상속자들의 내용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을 위해 간단히 정리하자면. 박신혜가 극중 돈 많은 집안 자제들만 간다는 명문 고등학교에 ‘사회적 배려 대상자 전형’으로 입학하는데, 이 전형은 신체적 장애나 경제적 어려움 등을 이유로 전체 입학 인원의 얼마간을 계층 간 갈등 방지의 차원에서 나머지 학생들과는 다른 기준으로 선발하여 장학금을 수여하는 것이고, 그렇게 입학한 학교에서 박신혜가 돈 많은 집안 자제 이민호를 만나면서 벌어지는 로맨스를 그린 이야기이다.
사회적 배려 대상자 전형에 담긴 정치인이나 교육정책가의 훌륭한 비전에도 불구하고 극중에서 ‘사배자’는 적극적으로 찍어 눌림 당한다. 사배자가 왜 그와 같이 찍어 눌림 당해야 마땅한지에 대한 어떠한 고찰도 없다. 단순하다. 우리와 다르니까.
나는 사회적 배려 대상자 전형으로 로스쿨에 입학했다. 사유는 경제적 어려움이었고 졸업까지 전액 장학금을 지급받을 수 있었다. 개개인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대체로 장관, 대법관, 국회의원, 판검사, 의사, 교수, 대기업임원, 성공한 개인 사업가 등 다양한 영역에서 사회적 안정을 거머쥐고 자녀를 잘 교육시킬 수 있었던 부모님 슬하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 로스쿨에 입학하는 동안, 질병과 가난, 무식, 불운으로 점철된 세월을 보내고 죽기 전 내놓을만한 성과로는 딸자식 하나 둔 것 밖에 없는 부모님 밑에서 태어나 도저히 공부할 수 없는 환경에서 혼자 분투하여 그 곳에 입학했던 내가 있었다.
그들과 나는 태생부터, 그리고 입학 당시부터 달랐고, 재학 중 가족들로부터 받은 보살핌의 정도도 달랐다. 나는 해치울 수 없는 공부 양을 매일 맛보면서 경쟁이 버거워지고 도태될까 불안해지니, 해야 할 공부 자체보다 이러한 불공평한 경쟁을 하고 있는 현실에 눈을 돌려 불만을 갖게 되었다. 허나 불만스러운 감정 끝에 돌아오는 것은 계속해서 경쟁하는 것 밖에는 별 수가 없다는 암담한 마음뿐이었다. 누구를 탓하고 책임을 돌릴 것인가, 좋은 부모와 성실성을 가진 그들? 나의 경제사정을 고려해 장학금의 혜택을 주며 나를 입학시킨 학교? 아니, 선택은 내가 하였고 결과에 대한 책임도 오롯이 나에게 있었다. 이제 화살은 나의 존재 자체에로 돌아갔다.
나는 그 곳에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인데 그 곳에 있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과거, 불리한 환경 속에서도 끈기를 잃지 않는 성품을 가진 내가 사회에서 잘 쓰임 받을 자리가 있을 것이라고 수없이 되뇌었던 자기암시는, 내가 있으면 가장 안 될 자리로 나를 보내었다. 나는, 나와 달리 그 곳에 있을 자격을 진정으로 부여받은 그들과 나의 차이를 인정하고, 그러한 자격을 받지 못한 나를 격하시키고 그들로부터 소외시켰다. 그러는 동안 일평생 꾸준히 긍정의 말을 되뇌며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던 과거의 나와도 달라졌음을 느꼈고, 생기 가득했던 그 때의 나로부터도 소외시켰다. 이제 나를 이루는 정체성도, 내가 속할 곳도 어디에도 없었다.
서퍼들 사이에서는 서핑을 ‘빈익빈 부익부 스포츠’라 한다. 잘 타는 사람에게는 더 많이 탈 기회가 주어지고, 그런 연습의 기회를 많이 부여받은 사람일수록 더 잘 타게 되며, 결국 이것이 순환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잘 타는 사람에게 더 많이 탈 기회가 주어진다는 부분이 꾸준히 이야기하였던 ‘하나의 파도에는 한 명의 서퍼만 올라타기’ 원칙에서 나온, 어느 한 파도의 주인은 피크에서 서핑을 시작한 자라는 귀결, 나아가 파도를 많이 타고 싶다면 피크를 파고들어오는 다른 서퍼들에게 자리를 빼앗겨 숄더로 밀려나지 말고 제 자리를 지키자는 구호와 연결된다.
그래서 서핑을 오래 한 사람들은 ‘욕을 많이 먹어야 서핑이 는다’고도 한다. 라인업에서 파도를 잡기 위한 좋은 위치, 즉 피크 가까이를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지 말고 잘 유지하고 있어야 함은 물론이고, 나아가 때로는 위 대원칙을 무시하는 반칙도 서슴지 않아야 한다고 한다.
서핑의 반칙에 관련된 용어에는 ‘드랍’, ‘스네이킹’, ‘인터피어’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이 ‘드랍’이다. 드랍은 이미 누군가가 피크에서 파도를 올라타 파도가 만들어주는 길을 따라 내려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같은 파도 위에 올라탐으로써 다른 사람의 진행을 방해하는 것으로, 이 경우 다른 사람의 파도를 뺏어 타는 예의 없는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일 뿐 아니라 두 서퍼가 충돌해 위험한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어 반드시 피해야 한다.
그러나 라인업에 있는 서퍼 중 누군가가 피크의 위치를 정확히 확인하는 눈을 가졌고, 좋은 체력과 깡다구로 그렇게 확인한 피크에 가장 가까운 위치를 벗어나지 않는 요령을 가져서, 계속해서 라인업에 밀려들어오는 파도의 주인이 된다면 어떡하겠는가? 물론 이 서퍼의 행동이 매너 있다거나 옳은 것은 아니다. 추후 상술하겠지만 라인업에 있는 서퍼들 사이에는 파도를 탈 기회를 어느 한 사람이 독점하지 않고 공유하여야만 한다는 ‘로테이션’이라는 규칙이 있다. 하지만 어느 서퍼가 이런 규칙을 지키지도 않는다면? 악에는 악으로 대응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여기에서 반칙의 필요불가결성이 발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들러리가 되기 위해서 거친 파도를 뚫고 라인업까지 온 것이 아니므로 아주, 아주 가끔은 반칙을 해서라도 내가 탈 파도를 확보할 줄 알아야 한다. 서핑은 빈익빈 부익부 스포츠, 어떻게든 내가 파도를 탈 기회를 만들어내어야 실력이 늘고, 그래야 그 다음 파도를 탈 기회를 만들어 낼 수도 있는 것이다.
내가 반칙에 좀 더 관용적인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로스쿨에서 지내던 3년 내내 있지 말아야 할 자리에 있었다고 느끼던 나는, 내가 반칙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만약 이전에 반칙을 하면서 산 적이 있다면, 눈 질끈 감고 ‘이쯤 어때, 어쨌든 너희가 나한테 자리 줬잖아’라고 당당하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아쉽게도 정공법으로 세상을 살아 온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무식과 무능, 어머니의 질병, 그리고 우리 가족을 둘러싼 가난도 나의 영리함과 성실함에서 나온 학업성취능력 앞에서는 그럭저럭 희미해지는 것 같았다. 적어도, 내가 그러한 능력을 갖지 못했다면 나는 내가 받았던 것보다 훨씬 큰 무시를 당하며 살았을 것임은 확실하다. 그와 같이 어린 시절부터 나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무조건적인 동정에서 기특함, 장함으로 바뀌어가는 것을 보고 나는, 나의 능력을 계속해서 세상에 보여주어야만 세상이 나를 대하는 방식 역시 지속적으로 개선될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렇게 나는 정공법으로 사는 것이 이로움을 어린 시절부터 경험으로 깨우쳤고 꼼수를 궁리할 여유조차 없었다.
결국 드랍을 모르던 나는, ‘사배자’라는 꼬리표로 마음을 크게 다쳤고, 힘들게 라인업에 나아가서도 존재감을 죽이고 숄더에만 조용히 머물며 남들이 피크에서 각자의 파도를 타고 나아가는 것만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