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살 때 처음 만난, 엄마는 나에게 대단히 특별한 존재였다. 태어나서부터 엄마를 처음 볼 때까지 나는 아빠가 찾은, 어느 맘씨 좋은 이웃 가정의 막내딸로 살고 있었다, 위로는 나를 잘 보살펴주던 17살, 15살 많은 언니들이 있었다. 나에게 다른, 진짜 부모님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다. 아빠는 여러 차례 만나기도 하였었다.
하지만 엄마는 9살 되던 해 처음 만나게 되었고, 그 때를 기점으로 나는 태어난 이래 쭉 살고 있던 이웃 가정을 떠나 나를 낳아 준 처음 본 엄마, 몇 번 본 아빠와 함께 살도록 결정되었다. 엄마와 아빠는 그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겠지만 우리는 그다지 합이 잘 맞지 않는 가족이었다. 우리 모두에게 삶은 긴장과 불안, 피로의 연속이었다. 함께 살게 된 지 5년 되었을 무렵 아빠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아빠가 세상을 떠난 14살부터 엄마 또한 세상을 떠난 21살까지 나와 엄마는 단둘이 살았다. 엄마는 아팠고, 무능했으며, 같은 이유로 사람들의 무시를 받았다. 그리고 그러한 엄마와 함께 사는 나는 사람들의 동정을 샀다.
다행스럽게도 머리가 좋고 퍽 야무졌던 나는 어려서부터 어른들의 말귀를 잘 알아듣고 공부를 곧잘 하였으며, 그러한 점은 엄마와 나로 구성된 우리 가족이 향후 가난을 극복하고 더 이상의 무시와 동정이 없는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희망의 실마리를 제공해주었다. 그래서 나는 공부했고 원하던 명문대에 입학했다. 정상적인 삶에 대한 오랜 희망이 현실화되는 듯 했다. 그러나 엄마가 세상을 떠났다.
아픈 엄마와 단 둘이 살면서 보낸 청소년기의 7년, 이해할 수 없는 엄마의 말과 행동으로 고통스러운 순간들이 숱했으나 엄마를 떠나 내가 갈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친척들은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엄마를 버렸으며, 나의 친구들은 나의 삶을 이해하기엔 경험이 부족하였고, 학교 선생님은 이런 삶의 고민까지 공유할 만큼 가까운 곳에 있지 않았다.
의미 없는 싸움과 삶을 위한 화해의 순간들이 매일같이 계속되는 동안 나는 알았다. 이것이 바로 ‘사랑’으로 묶인 관계구나. 우리는 서로를 강하게 사랑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단단히 얽힌 상태로 우리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에 맞서 싸워야만 하는구나.
나는 어렸을 때부터 말하고 글 쓰는 것을 좋아했다. 둘 중에 꼽으라면 말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말하는 것을 직업으로 가지면 행복하게 살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방송에 나와 끊임없이 말을 하는 아나운서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그게 아니라도 방송국에서 일을 한다면 퍽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방송이 가지는 변화에 민감하며 역동적인 성질이 마음에 들었나보다.
그래서 신문방송학과에 지원해 입학했다. 수업에서 배우는 내용들은 아주 흥미로웠고 적성에 잘 맞았다. 학교 방송국 동아리의 아나운서를 맡아 선배들의 좋은 평가를 받으면서 재미있게 활동했었다. 엄마가 계속 살아 있었다면 용기 내어 아나운서 채용 시험에 도전을 해 보았을지 모른다. 그게 아니더라도 방송국 입사 시험을 보거나 어떻게든 관련된 일을 하며 살고 있었을 것이다. 방송국도 대기업인데, 그렇게 하면 엄마랑 나 둘이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돈은 충분히 벌 수 있으니까. 그러려고 지난 날 열심히 공부해서 신문방송학과에 입학한 것이 아닌가. 이제와 돌이켜보면, 내가 방송이나 전공과 관련된 일을 하지 않기로 결심한 데에는 함께 살아갈 엄마가 더 이상 없다는 게 큰 영향을 미쳤겠구나 싶다.
엄마가 죽은 후 1년간은 아무 일 없었던 체 하며 학교를 다녔지만, 극심한 공허함, 외로움, 예민함으로 생의 의미를 점점 잃어갔다. 이렇게 더 지내다간 나 역시 큰 일 치르겠구나 하는 마음에, 혼자 살고 있는 서울을, 한국을 잠시라도 벗어나 있고 싶었고, 외국 생활하기에 현실적으로 가장 간편한 방법인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준비해 떠났다. 워킹홀리데이의 좋은 점은 두 가지였다. 첫째, 나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내가 가진 환경을 우선으로 두고 하는 무시나 동정에서 자유로울 수 있어서 편했다. 둘째, 엄마가 세상을 떠났는지 아니면 한국에 살고 있는데 내가 외국에 있어서 못 만나는지 분간이 잘 안되어서 덜 마음 아팠다.
그렇게 호주를 시작으로 어학연수, 교환학생, 봉사활동 등을 통해 여러 나라에 가서 지낼 기회를 가졌다. 나의 가족이나 배경이 아닌, 나라는 사람, 그리고 내가 가진 능력으로 평가받고, 한국이라는 하나의 사회가 규정한 규범 규칙을 벗어나 보다 자유롭게 살 수 있다는 점에서 외국 생활은 매력 있었고, 이러한 매력에 매료된 나는 국경을 넘나드는 일을 하고 싶어졌다. 유학을 가거나 최소한 한국에서 대학원을 재학하면서 그에 필요한 공부를 더 해보고 싶었다.
사실 처음에는 유학 쪽으로 마음이 많이 기울었다. 그런데 학교에 복학해 졸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갑자기 덜컥, 겁이 났다. 내가 속해있는 단 하나의 적, 대학이라는 울타리가 막 사라지려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음 스텝으로 큰 시간적 공백 없이 넘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외 대학원 입학은 금전적인 부분이나 준비에 드는 시간적인 부분에서 현실성이 요원해보였다. 국내 대학원 입학은, 졸업 후 과연 공부한 만큼의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인지 불확실해보였다.
그 때 우리나라에 정착 중이던 로스쿨 제도가 나의 머리를 비집고 들어왔다. 여기도 하나의 대학원임은 분명하고, 법 공부를 해서 변호사 자격을 따면 전문 분야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때 해외 관련된 일을 하는 쪽으로 얼마든지, 오히려 더 수월하게 진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 3년의 시간을 들이면 변호사 자격이 나오니 그보다 더 확실한 보상은 없을 것 같고, 사회적 배려 대상자 전형으로 입학하면 졸업할 때까지 전액 장학금이 보장되고, 로스쿨 입학하면 은행에서 대출도 자유롭게 받을 수 있다니 그걸로 공부하는 동안 생활비를 충당했다가 졸업 후 일하면서 갚으면 될 터였다. 무엇보다도 변호사가 되면 내가 아주 어린 시절부터 받아온 지긋지긋한 무시와 동정을 더 이상 받지 않을 수가 있었고, 이 점은 전술한 장점들과 버무려져 내가 로스쿨을 준비하는 큰 동력이 되었다.
그렇게 당시 내 인생 최선이자 최고의 선택이라고 생각한 로스쿨에서 단연코 최악의 시간들을 보내었고, 3년의 시간을 그곳에서 그저 버텨내는 데에 모든 에너지를 소진해버린 나는 졸업 후 어떠한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외국 관련된 일을 한다거나, 하고 싶던 방송 관련 일을 전문으로 다루는 변호사가 된다거나 하는 개척 정신은 사라진지 오래였고, 껍데기만 남아 그 곳을 탈출한 나는 다른 여느 사람들처럼 흔하게 공고가 올라오는 조그마한 법률사무소들에 무기력하게 이력서를 보내고 있었다.
사실 엄마라는 인생의 가장 큰 동료를 잃은 나는, 간절하게 동료를,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집단을 바라고 있었을지 모른다. 엄마와 내가 각자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역할을 하면서, 둘의 힘으로도 부족한 부분은 어떻게든 노력해 메워보고, 공동의 미래를 향해 나아갔던 것처럼, 나는 사회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역할을 하면서, 인정받고 부족한 부분은 동료의 도움을 받고, 속한 집단의 구성원들이 하나의 미래를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로스쿨에서 나는 매일같이 내가 할 수 없는 것들을 하기 위해 싸워야만 했다. 나는 나의 아빠가 되어 다음 달 생활비를 걱정해야 하고, 나의 엄마가 되어 내가 먹고 입고 누울 환경을 신경 쓰면서, 딸인 나 자신이 되어 공부를 하여야 했다. 성인이 되어 이런 것 신경 쓰는 게 뭐 대단한 일이냐 싶을 수도 있겠지만, 당시 나와 함께 경쟁하던 이들은 오직 공부 단 하나에만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을 가진 이들이었다.
그렇게 나는 그들과 동료는커녕 경쟁상대가 될 수조차 없음을, 아니, 그들과 경쟁상대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불합리한 일이라는 것을 매일같이 깨달으며 지냈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은 변호사 시험을 마친 후 기숙사와 자취방을 정리하고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함께, 혹은 가족들이 포상과 같이 주는 돈으로 해외여행들을 떠났고, 나는 아무도 찾지 않는 학교 앞 자취방이자 나의 유일한 집인 그 곳에 그대로 혼자 남겨진 채 끼니를 챙길 기력조차 없었다.
그런 상태에서 좋은 이력서가 나올 리가 없었고, 결국 대표 변호사와 나, 담당 직원이 한 업무 단위로 일하는 소규모 법률사무소에 겨우겨우 취직하였다. 몇 살 차이나지 않던 대표 변호사를 선배이자 크게 보아 동료로 생각하고도 싶었지만, 그는 이따금씩 윗사람으로서의 따끔함과 냉정함을 보여주었고, 이내 나는 그를 엄격하게 상사로, 나를 업무적으로 평가하고 지시하는 사람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바짝 엎드려 맡은 일을 잘 해내니 그는 점점 사무실 바깥을 돌며 영업에만 힘쓰면서 내가 질적이나 양적으로 더 감당하기 힘든 업무들을 가져왔고, 나는 사무실 안에서 내 책임 하에 그것들을 오롯이 홀로 처리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매일 갖고 있었다.
사실 변호사 일이라는 것이 참 개인적이다. 변호사가 여러 명 있는 법무법인일지라도 한 사건마다 담당 변호사가 명확하게 배정된다. 보다 규모가 큰 법무법인에서 한 사건에 여러 명의 변호사를 명목상 배정할 수도 있지만, 통상 증거를 수집해서 법원에 보낼 서류를 작성하는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한 명의 변호사가 정해져있고 나머지 변호사는 담당 변호사의 요청에 의해 얼마간 필요한 도움을 주는 정도의 역할만 한다. 대표님이나 팀장과 같은 선배 변호사가 있어 도움을 받을 수 있더라도 그들에게 도움을 받아서 일을 완결 짓는 것은 담당 변호사 개인의 역할이다. 법원에 제출하는 서류에는 그 서류를 작성한 담당 변호사의 이름이 명확하게 표시되고, 그 변호사가 의뢰인과 소통하는 것은 물론 법원에 가서 판사를 대면한다.
그렇게 간절히 동료를 원했지만 로스쿨 안에서도, 로스쿨 밖에서도 동료를 찾지 못한 채 일 년여를 보낸 나는, 어느 여름 날 고등학교 친구의 갑작스런 제안으로 양양의 한 바닷가를 찾아 서핑을 하게 되었다. 뒤에서 밀어주는 파도의 힘만으로 나와 나를 태운 서핑보드가 바닷물을 가르고 해변을 향해 나아가는 것, 그와 같이 움직이는 서핑보드 위에서 내가 중심을 유지하며 일어서는 노력을 하는 것은 굉장히 신선하고 스릴 있었다. 물론 쉽지 않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재미있었다. 그리고 보드 위에 일어서서 수면 위의 시원한 공기를 가르며 지나갈 때에 얼굴에 느껴지는 바람의 감촉은 청량하기 말할 데가 없었다. 패들링을 해서 수면을 가르는 팔에 느껴지는 바닷물의 저항을 느낄 때에도, 보드위에 가만히 누워 조류의 흐름 따라 서서히 움직이는 것도 보드를 들고 바다에 나와 즐겁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
서핑이 끝난 후 바비큐 파티가 열려 함께 고기를 구워먹고 음악에 맞추어 몸을 흔들기도 했다. 서퍼들은 쿨하고 위트 있었다. 도시에서와 같이 옷차림이나 행동거지 하나하나에서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는 것이 없었다. 내 상상 속 서퍼들 그대로였다. 나도 이렇게 멋진 서퍼가 되어서 낮에는 다른 서퍼 동료들과 함께 바다에서 서핑하고, 서핑이 끝나면 함께 맛있는 식사를 한 후, 밤에는 술 한 잔과 음악으로 함께 긴장을 내려놓고 싶었다. 그래, 내가 속하고 싶은, 속할 수 있는 집단은 여기구나, 여기에서 멋진 동료들을 만날 수 있겠구나.
나는 그 해 여름 몇 번 더 해변을 찾았다. 그러나 아직은 나를 서핑의 세계로 확실히 이끌어 줄 서퍼 동료, ‘서프버디’를 만나지 못했고, 동해는 금방 추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