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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경 Oct 30. 2022

패들, 푸쉬, 업, 테이크오프

그렇게 가을이겨울이 왔다. 서핑에 대한 강렬한 기억은 내 안 어딘가에 남아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그 날의 행복했던 순간들, 바닷물의 감촉, 바람의 냄새, 바닷물을 가로지르는 움직임, 위태위태한 보드 위, 잘 구워지던 고기의 냄새, 모든 것을 잊게 하는 음악과 분위기 등등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나는 날이 따뜻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다시 여름이 되었고 나는 본격적으로 서핑을 시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되었음을 알았다서핑 할 수 있는 해변에서 휴가를 보내기로 결심했다. 장비를 대여하고 숙박을 예약 할 서핑샵을 찾는데 있어서는, 이미 마음속에 정해놓은 곳이 있었다. 지난 해 서핑을 처음 한 해변과 같은 해변에 있는, 서핑 샵 앞에 데크가 널찍하게 펼쳐져 있는 곳이었는데, 그 부근을 지날 때마다 스무 명은 훨씬 넘어 보이는 사람들이 테이블에 옹기종기 둘러앉아 오순도순 고기를 구워먹으며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보았더랬다. 


샵 내부를 구경하러 잠시 들른 적이 있는데, 사장님이 아닌, 그냥 서핑 샵에 자주 오는 것처럼 보이는 손님이 능숙하게, 그리고 친절하게 이것저것 안내를 해 주면서 ‘여기는 사장손님 구분이 없어요저는 오래 된 손님인데 이렇게 사장님 일 도와드리고새로 오신 손님한테는 서핑 선배로써 서핑도 알려줘요여기서는 서핑 선배서핑 후배가 다 같이 서핑해요.’라고 이야기했었다. 그 곳의 서핑 후배가 되고 싶은 마음이 내 안에서 1년은 영글다가 밖으로 터져 나왔다. 




수요일 즈음이었나아무튼 주 한 중간에 1그리고 기초 강습을 예약하고 하룻밤 머물렀다여름휴가 시즌이었지만 손님이 많지 않아 사장님이나 서핑강사, 스탭들이 혼자 가서 서핑 전후 멀뚱멀뚱 하고 있는 나를 잘 챙겨주었다. 직접 한 음식으로 식사할 때 초대해주기도 해서 혼자 간 휴가였지만 전혀 외롭지가 않았다. 바다도, 사람들도, 분위기도 전부 좋았다 그렇게 며칠 더 보내다가 금요일 저녁이 되었다.


조용한 해변에 하나 둘 승용차들이 도착하고 사람들이 네댓 명씩 내렸다오랜 친구를 본 마냥 다들 들뜨고 서로를 반가워하는 모습들이었다열, 열하나, 열둘, 어느새 스무 명은 넘는 사람들이 작은 가게 안을 가득 채웠다. 가게는 밝고 생동감 있는 에너지로 가득했다. 다들 테이블을 찾아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한 주 동안의 안부를 묻고 있었다. 이 사람들이 이 금요일 밤에 대체 다 어디서 무엇 하러 여기까지 왔나.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고개를 갸웃하는 나에게 옆에 있던 사람이 일러주었다. “이 사람들은 평일에는 서울에서 일하다가 주말이 되면 차를 나누어 타고 여기와요. 이곳에서 서핑하고 주말을 보내다가 일요일 밤에는 다시 서울로 돌아가죠. 매주요.”


나는 정말 사람들이 미쳤는지 알았다아니서울 근교 가평양평도 아니고 강원도 동해 바다를 매 주 주말마다 온다니나는 여름휴가로 1년에 한 번 올까 말까한 게 바다인데. 매 주말 휴가를 온다고, 제정신들인가, 체력도 엄청 나네.




머지않아 나는 바로 그 미친 사람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혼자 왕복 5시간은 되는 거리를 운전해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은 꽤나 고되었기 때문에 인터넷 서핑 커뮤니티에서 자기 차량으로 카풀 제공하는 사람을 찾았다. 수요일쯤 되면 커뮤니티에 카풀 제공 글들이 하나 둘씩 올라왔다. 금요일 저녁이면 부리나케 퇴근해서 정장을 벗어 던지고 편한 트레이닝 복으로 갈아입고는 배낭에 세면도구만 간단히 챙겨 약속한 카풀 차량에 올라 서울을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늦은 밤이 다 되어 양양에 다다르면, 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이미 이런저런 안주거리에다 맥주 한 잔씩을 하고 있다. 저번 주에도 봤지만, 그래도 오랜만이라는 듯이 반겨준다. 어서 와 앉으라며 자리를 만들어주고 맥주 한 캔을 쥐어준다오느라 고생했다고저녁은 먹고 왔냐며 상냥하게 묻고는 먹을 것을 앞에 가져다준다


그렇게 금요일 밤은 저물고 쏟아지는 햇살 아래 토요일과 일요일매주 한 번씩이틀 동안 찾아오는 휴가가 나를 기다린다. 다함께 서핑보드를 들고 바다로 향해 물놀이하듯 한껏 놀고 나온 뒤,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점심 뭐 먹을까?’한다. 때로는 밥을 직접 지어서, 때로는 배달시킨 음식을 햇볕 내리쬐는 데크 테이블 위에서, 또 이따금은 옆 동네 새로 생긴 맛집에 차를 나누어 타고 가서 든든히 먹고 온 뒤, 서핑 한 번 더 할 사람은 바다로, 낮술 한 잔 할 사람은 편의점으로, 한 숨 잘 사람은 숙소로, 태닝 할 사람은 특히 볕 좋은 곳으로 뿔뿔이 흩어져 오후를 보내다 저녁이면 또 ‘저녁 뭐 먹을까?’하는 것이다. 




서핑 강습 시간이 아니라도 강사들이 바다에 있을 때 함께 바다에서 서핑하고 있으면 강습 신청을 따로 하지 않아도 그들은 계속해서 나에게 서핑 기술에 관련된 무언가를 알려준다패들링 자세가 옳은지, 보드 위에 올라앉은 자세는 바른지, 보드에 올라앉은 상태에서 어떻게 방향을 전환해서 해변 방향을 바라보다가 먼 바다를 향하도록, 혹은 그 역을 할 수 있는지 그때그때 나에게 필요한, 내 수준에 맞는 연습할 거리들을 알려준다. 


그들의 사려 깊은 도움으로처음으로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내 파도를 스스로 잡아 일어난 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나는 보드에 배를 대고 엎드린 채 해변을 향해 누워 있었고저 멀리서부터 점차 날을 세우며 다가오는 파도 하나를 얼핏 보았다. 내 주변에는 강사 두 명이 있었고 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나에게 소리쳤다. 


“패들, 패들, 더, 더, 패들! 패들!” 


밀려오던 파도가 부서져 거품이 되는, 파도의 힘이 가장 강력한 지점으로 빠르게 이동하도록, 그들의 응원에 맞춰 나는 계속해서 팔을 젓고 또 저었다. 숨이 턱턱 막히고 머리가 하얘질 때까지 저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파도가 내 보드의 끝을 밀면서 보드가 부웅하고 떠오르는 느낌이 전신에 느껴졌다


“푸쉬!”


두 손을 나란히 허리 옆에 두고 보드를 힘껏 밀어내면서, 하체는 그대로 두고 상체만을 보드에서 들어 올려 가슴이 보드 쪽이 아닌 정면을 향할 수 있도록 하는 동작이다. 보드에서 일어날 준비를 하는 것이다. 


“업” 


보드에서 일어나는 동작인 ‘테이크오프’를 하라는 신호이다. 중심을 유지하면서도 빠르게, 두 발이 해변을 향하는 보드 위에 앞뒤로 나란히 올라온 채 보드 위에 일어서야 한다. 중심을 잃지 않도록 두 무릎은 살짝 굽힌 상태로, 그리고 양 팔은 어느 정도 치켜 든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 좋다. 


그렇게 보드 위에서 안정적으로 테이크오프를 한 나는 얼마간 바닷바람을 두 볼에 시원하게 맞으며 파도타기즉 라이딩을 했다. 해변가로 돌아와 보드에서 내려와 곧장 강사들이 있던 라인업으로 돌아가서 ‘저 지금 스스로 파도 잡은 거 맞아요?’, ‘저 다른 사람이 뒤에서 밀어주는 도움 없이 혼자 파도 처음 잡아봤어요!’라고 한껏 흥분해서 얘기했다. 




내 인생에서의 테이크오프그것은 단연코 오랜 학생 시절을 지나와 변호사로 사회에 두 발로 우뚝 서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것이리라


사실 우리나라에서서른이 갓 된 젊은 여성이 변호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것은다른 무엇으로 시작하는 것에 비해 굉장히 유리한 여건을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이십 대 중반에 대학을 함께 졸업한 많은 여자 동기들이 곧바로 직장 생활을 시작하였는데, 그들이 말단 여사원으로 느낀 부당함은 정말 숱하게 많았다. 내가 변호사가 되었을 즈음에는 그들은 보통 대리 정도 직급을 갖고 있었는데 회사 생활이 부당하고 불만족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나는 변호사로서 나에게 주어진 일만 잘 하면 되었고그것을 잘 하지 못하였을 경우에는 상급자인 대표 변호사의 합리적인 지적이 따랐지만 그 외에 성별어린 나이부족한 사회경험과 같은 업무 외적인 것으로서 무시당하는 일은 단연코 없었다청년층부터 노년층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대부분 나보다 연장자였던 의뢰인들은, 사회에서는 사장님이며 부장님, 팀장님, 각종 직함이 있었을지언정 나한테는 ‘변호사님, 잘 부탁드립니다.’하면서 부드러운 태도를 취하고 보았다. 


대표 변호사와의 관계도 그가 나에게 월급을 주는 상급자일지언정 일반 회사의 사장과 직원의 수직적 관계와는 완전히 다른 양상을 띠었다. 그와 나는 동일한 능력을 가진 변호사인데, 다만 그가 변호사가 된 지 몇 년 더 되었을 뿐인 ‘선배’였고, 나는 ‘후배’였다. 그는, 비록 경험이 부족할지언정 자격증을 취득했다는 이유로 법률 전문가임이 명백한 나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물어보았고, 나는 업무 전반에 있어 상당히 높은 정도의 자율성을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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