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움으로 이어진 사이를 끊어내기

by 미경

그렇게 어딘지 안도되면서 호주에서 식사량이 많이 늘었다. 여전히 천천히 먹어야만 해서 식사 속도는 느렸지만 한국에서처럼 한 끼에 한 시간씩 걸리지는 않았다. 호스텔 식사 공간에서 먹으니 한 번씩 그곳에서 만난 다른 사람들과 같이 먹기도 했다. 모두들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친구를 사귀는 게 목적이었으니 여유로운 속도로 식사를 했고 식사가 끝나도 자리를 바로 정리하지 않고 한참을 앉아서 계속해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 밥 먹는 게 조금씩 덜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소화가 잘 될지 늘 염려했고 체하는 데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여전히 일주일에 한 번씩은 체했다. 하지만 체하는 빈도는 천천히 내려가고 있었다.


식사량이 늘고 체하는 빈도가 줄어드니 몸에 훨씬 힘이 났다. 기운이 나니 기분도 좋아졌다. 좋은 친구들을 만나 함께 요리하고 나누어 먹으니 더 즐거웠다. 한국 친구들과 한국 음식을 해 친구들에게 선보이기도 했고, 다른 친구들이 그렇게 하기도 했다. 식사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 된다는 걸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여전히 한 번씩은 몸살이 났다. 겨울이 되어도 낮 기온이 20도 이하로 떨어지지 않는 브리즈번은 실내 난방이 거의 없는 문화를 갖고 있다. 계절이 바뀌어 아침저녁으로 쌀쌀해져도 난방이 안 되니 옷을 껴입고 두꺼운 이불을 덮을 뿐 달리 차가워진 공기를 피할 길이 없었다. 기온이 몇 도씩 한 번에 내려갈 때마다 꼭 몸살이 났다. 몸이 추위를 버티다 이렇게 된 것이니 딱히 약을 먹는다고 나을 일도 아니고, 며칠간 푹 쉬고 잠을 많이 자면 괜찮아졌다.




B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이유로, 내가 B와 함께 보내는 시간을 진정으로 즐거워하지 않으면서도 그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도록 억지로 노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는 영국인 남자 친구와 셰어하우스로 둘만의 보금자리를 찾아 떠난 한국인 여동생 E와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과 현재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하였다. 친하게 지내던 많은 친구들이 호스텔을 떠나 허전함과 외로움이 커 내 곁에서 나를 챙겨주는 B와 자연스럽게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되었고 더군다나 B가 생활의 많은 부분을 도와주면서 B의 요구에 맞춰가는 형태로 행동하고 있다는 것이 E와의 이야기를 통해 명백해졌다. 특히나 E는, 우리는 각자 자신의 행복을 찾아온 거고, 그 큰 결정을 한 만큼 있는 동안 자신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한 선택을 하는 게 맞으며, 누군가의 행복을 위해 내 삶을 억지로 맞추고 있는 것이 옳지 않다고 했다. 그리고 자꾸만 어디론가 떠나는 여행자 친구들 때문에 힘들다면, 남자 친구를, 그것도 다른 곳으로 떠나지 않는 호주 현지인을 사귈 것을 강하게 추천했다.


E와 이야기를 나누었을 당시만 해도 B가 고백을 하기 이전이었다. B가 나를 정말 친구 이상으로 좋아하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어쨌든 지금은 둘이 가장 친한 친구 사이로 지내고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게 맞는 데, 내가 남자 친구를 사귀어서 B와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면 그를 서운하게 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 생각도 내가 B의 도움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에게 맞추어서 행동해야 한다는 마음에서 올라온 것이다.


하지만 B가 고백을 했고, 내가 B와 같은 마음을 갖고 있지 않은 이상 더 이상 친한 친구 사이로 지내기도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는 게 명백해졌다. 다행히 그때 즈음 손이 많이 좋아지고 있었기 때문에 B의 도움이 절실하지도 않았다. B로부터의 물리적 도움을 기대하는 나의 마음, 나로부터의 정서적 보살핌을 기대하는 그의 마음 모두를 이제는 끝낼 때가 되었다.


B의 고백을 들은 날 밤, 많은 생각을 했다. 살면서 받아온 무수한 도움, 나는 감사하며 그 도움을 바탕으로 내 일을 잘해나가는 것을 한참이나 벗어나, 나는 도움을 받았기에 저 사람들이 원하는 것에 꼭 맞추어 살아가야만 한다고 나를 가상의 틀 속에 가두었다. 그리고 그 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행동이나 생각을 할 경우에는 나를 혼내고 다그쳤고, 도움은 감사할 대상이라기보다는 죄책감을 가져야 할 대상이 되었으며, 끝없는 죄책감은 신체 건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E의 말을 되짚었다. 우리는 호주에서 각자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선택하고 행동해야 한다. 생각을 확장해 호주뿐 아니라 우리 인생 전체를 보았을 때, 각자의 행복을 최우선시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거나 필수적인 책임을 저버리지 않는 이상은, 개인의 행복을 확장하는 선택을 하며 살아가도 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나아가, 우리가 삶에 있어서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일까. 행복하게, 즐겁게, 이 한 생 무엇을 하더라도 내가 즐기다 살다 가면 되지 않겠는가. 그게 죽기 전에 이루어야 할 가장 중요한, 어쩌면 유일한 목표가 아닐까?


아침에 이런 생각들과 함께 깨어나며 그 어느 날보다 몸이 가벼웠고 기쁨과 자신감이 가득 차 있었다. B와 기회가 생겨 이야기를 했다. 그동안 주었던 도움은 정말 고맙지만 네가 요구하는 만큼의 정서적 보살핌이 나에게는 버겁게 느껴졌노라고 이야기했다. B는 자신은 곳 호주 비자 연장을 위해 태즈메이니아라는 호주 본토 남쪽의 섬으로 곧 떠날 것이니 어색하게 함께 호스텔에서 지낼 염려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B와의 조금은 특별했던 관계를 정리하였고 나는 마음을 깊이 주고받을 수 있는 남자 친구를 사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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