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내 곁에서 나에게 도움을 준 한 친구가 있었다. 칠레에서 온 남자 친구 B, B의 나이는 나보다 열 살 정도 아래. 박식하고 머리는 영특한 듯 보였는데 사람들과 두루 친하게 지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확실히 표현을 하고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며,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물어도 대꾸만 겨우 하는 정도였다. 영어를 상당히 잘하는 편에 내가 관심 있어하는 역사, 문화 부분에 흥미와 지식을 갖고 있는 터라 이야기가 재미있을 때가 많았다. 자연스레 시간을 함께 많이 보내게 되었는데, 감정적으로 나에게 의존하면서 나아가 내가 다른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을 가로막고 나를 독점하고 싶어 하는 느낌이 느껴질 때가 있어 이 B와 함께 있는 것이 늘 편하지만은 않았다.
발을 다쳐서 주방에 서서 요리를 하기 어려울 때, B는 자기 식사를 요리할 때 내 식사도 함께 해 내가 쉬고 있던 라운지룸으로 가져다주었다. 손을 다쳐 조리기구를 들 수 없어 요리를 하기 어려울 때, B는 역시 내 식사도 함께 만들어 끼니별로 보관 용기에 담아 냉장고에 넣어두어 내가 언제든 꺼내 먹을 수 있게 하였다. 다친 손에 힘이 돌아오고 통증이 완전히 가시기까지는 꼬박 한 달은 걸렸다. B는 내 식사를 계속해서 책임졌고, 도움이 고팠던 나는 그 호의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 무렵 친하게 지내던 호스텔 친구들이 하나둘씩 떠났고, 거의 B만이 남은 상황이었다. 이전에는 B와 함께 하는데에 감정이 소모되는 때가 많아 선택적으로 시간을 함께 보냈다면, 이제는 시간을 같이 보낼 다른 친구도 없을뿐더러, B가 나의 식사뿐 아니라 장보기, 빨래와 같이 손을 써해야 하는 모든 것을 전적으로 도와주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같이 하는 동안 자연스레 시간을 더 보내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B와 있는 게 전보다 더 즐겁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B의 독특한 성격 때문에 여전히 불편할 때가 있었는데, 손 기능이 점점 돌아오면서 B의 도움이 덜 절실하게 되자 그 불편한 감정이 점차 강하게 올라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B가 나를 도와주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계속해서 B의 베스트프랜드 자리를 지키며 감정적 의존을 받아 낼 수밖에 없었다. 결국 B는 어느 날 나를 친구 이상으로 좋아하고 있다는 고백을 해 왔고, 이 고백은 나에게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내가 갖고 있는 '도움'에 대한 '부담감'. 조현병을 앓고 사회생활이 전혀 가능하지 않던 엄마와 단 둘이 십 대 시절을 보내는 동안, 나는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절실했다. 기초생활수급자, 소녀가장으로 등록되어 국가의 도움을 받고 지낸 것은 물론이고 여러 후원자들과 연결되어 추가로 정기적 금전적 후원을 받을 수 있었다. 비금전적으로는 우리 집을 찾아와 한 번씩 청소도 해 주시고 식사에 초대하기도 하며 이모 삼촌처럼 연락을 주고받으며 살뜰히 챙겨주신 분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나에게 장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공부 열심히 하니 참 장하다', '엄마를 잘 모시니 참 장하다'. 이 칭찬은 어느새 내가 계속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지금 받고 있는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조건으로 해석되기 시작했고, 밖에서 봤을 때 싹싹하고 완벽한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기를 쓰게 했다.
장학금과 많은 도움을 받아 가면서 대학을 가고 로스쿨까지 마치는 동안 학비에 대한 부담은 덜었지만, 이 공이 결코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언젠가부터 나를 지배했다. 충분히 좋은 이름을 가진 대학과 로스쿨에 갔음에도 불구하고, 큰 문제나 어떠한 낙오 없이 공부를 잘하고 졸업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생판 남의 도움을 받아 공부를 한 이상 더 좋은 학교를 들어갔어야, 더 좋은 성적을 내었어야 맞다며 그렇게 하지 못한 나를 매일같이 질책하고 다그쳤다.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똑같은 조건에서 흠 없는 완벽한 성취를 한 나를 만들어놓고 부족하기 짝이 없는 나와 비교했다. 그러면서도 누군가는 이 모든 것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 온 나를 제발 인정해 주었으면, 흠결투성이인 나를 그래도 잘했다며 있는 내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주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일을 그만두고 쉬는 동안 소화불량이 더 심해진 것은 내 안에서 이러한 갈등이 심화되었기 때문이다. 일을 하는 동안에는 어찌 되었던 공부 잘하는 학생, 착한 딸로 살아온 궤도 위에 계속해서 있는 셈이었고, 비록 상상 속의 체력 끝내주는 완벽한 변호사와 나를 비교하며 혼내고 탓했지만 어쩌다 한 번씩 '수고했다'는 말을 들으면 그래도 나는 그렇게 최악은 아니구나 하고 하루하루 버텨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일을 하지 않고 있으니, 나는 내 생존이 걸렸다고 믿으며 살아왔던 공부 잘하는 착한 딸의 궤도에서 완전히 벗어나있었고, 지금 열심히 젊은 날 경력 발전을 위해 달려가고 있는 상상 속의 완벽한 변호사 모델이 눈에 어른거리면서, 이 자리에 있기까지 그동안 나를 도와줬던 사람들을 실망시켰다는 막심한 죄책감에 압도됐다.
밥을 먹을 때면, 지금 이 순간 직업적 성공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 하지 않는 나를 비난하고 있을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고, 온몸은 무언가로 동여맨 듯 답답해, 목구멍을 넘긴 음식이 밑으로 내려가지를 않았다. 몇 수저 뜨고 나면 금방 속이 답답해져 한참을 쉬었다가 괜찮아진 걸 확인하고야 다음 수저를 뜰 수 있었고, 음료수도 한 번에 들이마시지 못하고 한 모금 한 모금씩 쉬어가며 마셨다. 많이 뜨지도 못하면서 준비한 식사를 마치는데 한 시간 가까이 걸렸고, 덕분에 식사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음식은 전부 식어버렸다. 누군가와 함께 식사를 하는 건 상상하기도 어려웠고, 매 식사 시간이 고역이자 잘못해서 체해버릴까 하는 두려움의 연속이었다.
리듬이 조금이라도 어긋나거나 식사 직후에 해야 할 일이 있을 때, 기분이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음식은 금방 얹혔고, 이미 오래전부터 소화제를 먹는 게 습관이 되어 이제는 어떤 소화제를 먹어도 효과가 없었다. 음식이 얹혀서 위장에 걸려 있는 동안은 온몸의 기력이 계속해서 빠져나갔고 몇 끼는 우습게 건너뛰어야 했다. 전 날 체한 게 전혀 내려가지 않아 하루 동안 말 그대로 아무것도 먹지 못한 날도 여럿이다. 일주일에 한 번은 체했고, 잘 먹지 못하니 몸을 조금만 움직이면 몸살이 나 드러누웠다.
그래서 호주에 다시 오는 게 엄두가 잘 나지 않았다. 평생 살아왔던 익숙한 한국에 있으면서도 특별히 하는 일 없이도 이렇게나 불편하고 기력이 없고 힘든데, 이 몸으로 호주에 가서 어떻게 지낼 수 있을지 걱정이 많이 되었다. 일단 영어 학교에 가는 것만 해도 매일 네 시간씩 오 일을 가서 앉아 있어야 하는데 그걸 잘 버틸 수 있을지, 한국에서 나한테 맞는 거 요리해 먹는다고 해도 잘 넘어가지가 않은데 먹거리 다른 호주에서 무얼 먹고 어떻게 소화시키며 지낼지 까마득했다.
다행히 호주에 온 뒤로 많은 것이 나아졌다. 일단은 한국을 떠나 호주에 왔다는 자체만으로 최소한 무언가는 하고 있다는 마음이 들었는지, 아니면 나를 비난 중인 누군가가 있을지라도 그에게서 물리적으로 멀어졌다는 생각에 안심이 되었는지, 온몸을 무언가로 동여맨 듯한 느낌이 조금씩 덜해졌다. 일찍 자고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도 좋았다. 매일 아침 부지런히 향해 갈 데가 있다는 게 좋았고, 다음 날 할 일이 있어 일찍 잠자리에 가는 것도 좋았다. 수업을 듣고 나면 진이 빠졌지만 오후에 할 일이 없어 낮잠을 충분히 잘 수 있으니 좋았다. 호스텔의 같은 공간을 저마다의 속도로 오가는 사람들을 보며, 때로는 길고 짧은 이야기도 나누며, 늘 안으로만 파고들었던 생각이 조금씩 바깥으로 분산되기 시작했다. 낯선 곳을 걸어 낯선 곳에 장을 보러 가는 것도 좋았다. 낯선 곳을 알아가고 이해하려 노력하는 동안 생각은 또 밖을 향할 수 있었다. 나를 원망하는 데 쓰이던 시간과 에너지가 점점 줄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