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들링’은 바다에서 걸음마에 해당한다. 두 발로 균형을 잡는 데에 아무리 능숙하더라도 패들링이 익숙하지 않으면 균형을 잡는 시도를 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 똑같이 널빤지 위에서 하는 운동이라 여겨 쉽게 접근했던 스노우보더나 스케이트보더가 고전하는 지점이 바로 이 패들링이다. 그들이 멋진 균형 잡기 실력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패들링 이라는 낮지 않은 산이 있다.
무섭게 이야기하였지만 패들링의 동작 자체는 간단하다. 서핑보드 위에 배를 대고 엎드려 누운 채로 한 팔을 정면을 향해 쭉 뻗어 손을 물속에 담갔다가 그대로 물을 쭉 저어서 몸의 뒤편까지 가져오는 것이다. 수영의 자유영 영법의 팔 동작와 비슷하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수영은 팔의 움직임을 위해 상체, 즉 어깨를 좌우로 회전시키는 움직임을 사용하는데, 패들링은 그렇게 상체를 움직이면 서핑보드에도 움직임이 전달되어 보드가 직진하는 데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고 스핑크스마냥 상체를 꼿꼿이 들고 하여야 한다. 간단하게 ‘패들’이라고도 부른다.
한 팔, 한 팔 패들해서 물에서 나아가는 것은 한 발, 한 발 걸음을 떼어가며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모습과 비슷하다. 때로는 그 자리에 멈추어 서서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가 있다. 그래도 아주 조금이라도 꾸준히 나아가야 한다. 패들링을 해서 밀려오는 파도를 잡아타기 위해 대기하는 장소인 ‘라인업’에 도착하지 않으면, 우리는 서핑보드를 처음 내려놓은 해변가에 그대로 머물러 있게 되어 파도타기를 하지 못하거나, 바닷물의 흐름인 조류에 휩쓸려 원치 않은 방향으로 떠밀려가게 되거나, 갑자기 쳐 온 파도에 아무렇게나 휘말리게 된다.
‘라인업’은 먼 바다에서 밀려오는 파도가 거품처럼 부서지기 바로 얼마 전 지점으로, 파도를 잡아타기 위해 서퍼들이 대기하는 곳이다. 패들링을 해서 라인업을 나아가는 동안 우리는 이미 거품이 되어 부서진 파도를 수 없이 마주하게 될 것이다 나를 향해 다가오는 거품 파도들은 아주 큰 힘을 갖고 있어서 언제든 보드를 뒤집어 나를 바다에 빠뜨리거나, 해변가 쪽으로 나를 다시 밀어 낼 수도 있다. 일단 거품 파도를 헤치고 여차저차 라인업에 도착하게 되면, 라인업 지점에 해당하는 바다에는 믿을 수 없는 잔잔함이 펼쳐진다.
서핑을 한 지 몇 회 되지 않는 초보 서퍼들이나 파도가 아주 큰 날에 입수하는 서퍼들에게는 라인업에 다다르는 것 자체가 가장 큰 과제이다. 라인업에 도착하게 되면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크게 한 번 쉬고 보드에 엎드려있던 몸을 일으켜 보드 위에 올라앉는다. 그리고 멀리 밀려오는 파도를 보는 것이다. 시야가 넓어진다.
나의 삶에 빗대어보자면, 로스쿨이 나에게는 라인업이었던 것 같다. 부모님은 아프시거나 이른 나이에 나를 떠났다. 살아 계시는 동안에도 안정적으로 나를 돌볼 형편이 되지 않았다. 양육 환경은 계속해서 바뀌었고, 나는 어디에도 의지하지 않고 내 한 몸, 내가 지켜야만 한다는 것을 아주 어린 나이부터 알게 되었다.
21살 되던 해 어머니마저 돌아가시고 온전히 홀로 남게 된 나는 도무지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이제는 정말 내가 나를 책임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나는 그때부터 닥치는 대로 공부하고, 경험하며, 이력서에 넣을 거리들을 찾아다녔다.
슬픔과 외로움, 한없는 그리움, 억울함, 나를 주저앉히는 감정들이 불쑥불쑥 떠밀려왔다. 하지만 그러한 감정들에 매몰될 시간이 없었다. 거친 파도를 뚫고 먼 바다를 향해 패들링을 해 나가듯, 나는 감정들의 파도에 마냥 휩쓸리지 않고 꿋꿋이 나아갔다.
로스쿨에 입학하면 한 숨 크게 쉬고 안도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부모형제도, 이렇다 할 유산도 없는 내가 기댈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나의 능력뿐이고, 가장 빠른 시간 내에 나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은 전문직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일단 로스쿨에 입학하기만 하면 통상 3년이라는 기간 내에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는 것이 기대되기에 로스쿨에 들어가는 것은 나에게 고요한 바다처럼 잔잔한 마음을 선사해줄 줄 알았다.
여기서 라인업의 다른 한 가지 속성에 대해 알아보자. 라인업은 숨 가쁘게 패들링 해 온 이가 잠시 쉴 수 있는 안전한 곳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파도를 잡을 기회를 둔 숨 가쁜 경쟁이 벌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저 멀리서부터 한 줄의 모양을 하고 밀려오는 파도를 ‘파도 한 개’라고 할 때, 한 개의 파도에는 한 명의 서퍼만 올라타는 것이 원칙이다. 여러 명의 서퍼가 한 개의 파도를 함께 탄다면 서로 부딪혀 위험한 상황을 맞닥뜨릴 수도 있으니까. 캘리포니아나 호주, 발리 같이 좋은 파도가 많이 들어오지 않는 우리나라에서는 한정된 시간 안에 밀려오는 파도의 개수보다 라인업에서 파도를 기다리는 서퍼들의 수가 많기 마련이고, 서퍼들은 파도를 두고 경쟁을 펼치게 된다.
로스쿨에 입학하기 전, 나는 나만의 길을 가고 있고 그 길에서 늘 최선을 다 하여 충분히 좋은 성과를 내고 있다고 확신했다. 돈이 없는 와중에도 용케도 단기 유학 등 외국에서 공부 해 볼 기회를 여러 차례 잡았고 여러 외국어를 익혀 자격증도 따 놓았으며 동아리나 봉사 같은 갖가지 활동들로 남부럽지 않게 이력서를 채웠다.
하지만 그곳에는 비단 자신의 노력만이 아니라 그들 부모의 노력이 함께 더하여져 잘 만들어진 동료, 아니 경쟁자들이 있었다. 혼자 힘으로 죽을힘을 다해 거기까지 갔지만, 나는 그곳에서 보기 좋게 고꾸라졌다. 내가 꿈꾸던 잘나고 멋진 모습의 미래가 아무래도 내가 아닌 그들에게 속해있는 것 같았다.
살인적인 공부량과 그를 소화해내기에 충분치 못한 체력, 학점 0.01점을 두고 벌어지는 피튀기는 경쟁, 매달 통장에 남아있는 생활비를 걱정하여야 했고 체력 유지를 위해 밥도 잘 챙겨먹어야만 했다. 나는 나의 부모의 역할까지 다 하면서 공부를 해 내고 있었는데 다른 이들은 그렇지가 않았다. 분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힘들게 나아간 라인업에 내가 탈 파도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