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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N잡러의 잼있는 인생

새로운 규칙, 다른 서울 #10_잼있는인생 이예지

보통 자기소개를 하면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혹은 내가 어디에 소속돼 있는지를 중심으로 말해요. 그런데 그런 게 없다면, 어떻게 자기소개를 해야 할까요?


제가 그런 사람이거든요. 회사를 다니지도 않고, 그렇다고 어떤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프리랜서도 아니고. 직업이 없는 거죠. 그럼 그냥 백수 아니냐고요? 아뇨. 그때그때 기회가 오는 대로, 하고 싶은 일이 생기는 대로, 프로젝트로 일을 하거든요. 그걸로 나름 생계유지도 해요. 소위 ‘프로N잡러’라고 부르죠.


그게 뭐냐고 물어보실 수도 있어요. 황당하지만, 저도 제 정체성에 대해서 확답은 못 드리겠어요. 생각나는 대로 사는 걸 좋아해서, ‘그렇게’ 살다 보니 ‘이렇게’ 됐거든요. 최근에는 저같이 정체성 흐릿한 분들을 모아서 이야기하고 있어요. 만나보니 다들 고민도 비슷하더라고요.


괜찮은 인생인데, 이상하게 골치 아픈 ‘자기소개’


신기하게도 수입이 떨어질 때마다 새롭게 일할 기회가 오고, 그래서 이것저것 하긴 하는데 사실 일 사이사이 연속성은 하나도 없어요. 공통점이 있다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는 거죠.


예를 들면 저는 브랜드 마케팅 쪽 일을 좀 하다가, 그만두고 잡지를 만들기도 했어요. 농촌 쪽에 관심이 있어서 농촌 관련 잡지를 만들고 있고요. 축제를 기획하기도 했고, 제가 직접 잼을 만들어서 파는 회사를 만들기도 했고요.


저 같은 프로N잡러들이 흔히 하는 고민이 있어요. 바로 자.기.소.개. 곤란할 만도 하죠. 이런저런 일들을 하고 있다고 주위에 말하다 보면 더 곤란한 시선을 받기도 해요. 저를 불쌍히 여기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제가 어떻게 사는지 관심은 없으면서, 직업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저는 굶어 죽을 일도 없고, 재밌게 살고 있는데 말이죠.


축제나 잡지를 기획하면서 주위에 후원을 제안한다거나, 이러저러한 일로 바쁘게 산다고 말을 하면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시선이에요. 돈이 없어서 여기저기 나다니는 줄 알더라고요. 그냥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어서 그런 건데.


이해는 돼요. 프로N잡러들은 소속이 없으니까요. 제도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것도 없고, 수입이 안정적이지 않고, 고용에 있어서 보장을 받지 못하고 하는 게 흔히 겪는 일이죠. 거기에 따라오는 사회적 시선도 어쩌면 당연해요. 바로 그래서 사람들을 모아서, 이걸 어떻게 좀 나아지게 할 수 있을까, 뭔가 정책적인 해결 방법은 없을까, 같이 고민하려고요.


구미가 당겨도 지금은 맛볼 수 없는 <잼있는 인생>의 잼


그저 재미있게 살고 싶어서 ‘잼’ 사업


왜 이렇게 살게 됐냐, 고 물으면 재미있는 인생을 살고 싶어서. 물론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도 안정적이거나, 돈을 많이 버는 인생이 있을 수도 있죠. 저도 하고 싶은 사업으로 돈을 왕창 벌어보려던 때가 있었어요. ‘잼있는 인생’이라고, 아까 말한 잼을 만들어 파는 수공업 사업을 하던 때였죠.


그냥 심심해서 지어본 시가 시작이었어요. “퍽퍽한 식빵 같은 삶에 잼을 발라보자”는 내용의 시를 재미로 지었었거든요. 인생 ‘쳐발리기’ 싫잖아요. 암튼 이 시를 가지고 진짜 잼 파는 가게로 창업을 해보겠다고 장난삼아 얘기 했었는데, 이걸 보고 아이디어 좋다고 친구들이 몰려든 거예요. 친구들 넷이서 수제잼 사업을 시작했어요.


이왕 사업을 시작했으니 한 번 열심히 수익을 내보자고 노력했고, 2016년도에 진짜로 연 매출 1억을 달성했어요. 그런데 넷이서 수공업으로 연 매출 1억을 찍었다는 게 무슨 뜻이겠어요? 1억 나누기 4하면… 돈도 돈이지만 과로를 너무 심하게 해서 결과적으로 넷 다 병이 났어요.


사람을 더 뽑고 확장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막상 이렇게 일을 벌여보니 방향성이 의심되는 거예요. 수익을 늘리기 위해선 결국 사업의 틀을 만들고, 수익구조를 고정시키고, 비용 줄이고 자문을 받고... 그리고 돈 제대로 벌려면 중국에 공장 차려야 하거든요. 슬슬 짜증이 나더라고요. 나, 이런 거 하기 싫어서 ‘잼있는 인생’ 만든 거 아니었나?


사업을 키우면 더 이상 재미있는 인생이 아닐 것 같았어요. 이거 계속하면 모두 죽겠다 싶어서 결국 그만뒀어요. 지금도 ‘잼있는 인생’ 브랜드를 유지하고는 있지만, 예전에 벌여놓은 사업들은 모두 갈무리했죠. 대신 이 경험을 가지고 농촌 잡지도 만들고 축제도 기획하면서 소소한 일을 다시 하고 있어요. 수익이야 줄었지만, 이편이 더 ‘재밌는 인생’이니까요.


주변의 시선, 인생을 ‘노잼’으로 만든다


예전에 “한국에서 재미있는 인생이란 뭘까?”를 주제로 ‘노잼 포럼’이란 걸 열었거든요. 거기서 우리 인생이 어떤 이유로 노잼이 되는지 10가지 키워드를 뽑았어요. 가장 많이 뽑힌 카드가 ‘주변 시선’이었어요. 내 인생의 재미를 반감시키는 걸로 대부분 ‘주변 시선’을 꼽더라고요. 재미라는 게 대단한 건 아니거든요. 좋은 회사, 명예, 돈이 인생을 행복하게 만든다고 착각하는데 진짜 재미와 행복을 느끼는 건 굉장히 사소하고 일상적인 부분이거든요. 욜로, 소확행 같은 트렌드도 이런 걸 반영하고요.


한편으로 저는 이런 트렌드를 고민하고 일로 만드는게 제가 잘 하는 분야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2011년도에 맥스웰 브랜드 마케팅 공모전에서 상을 받았어요. 커피를 마시는 두 가지 순간, 하나는 열심히 공부하거나 일 할 때(맥스타임), 또 다른 하나는 친구들과 신나게 놀 때(웰타임), 대략 이런 내용. 이게 지금 얘기하는 ‘워라밸’ 같더라고요. 그거 보면서 “어, 나 유행의 선구자다” 했죠. 아, 저는 이제 소확행에서 나아가 전폭적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대확행을 챙기려고 합니다.


아무튼 항상 내 미래에 대해 더 넓게 상상하고 싶었는데. 지금처럼 이렇게 내 멋대로 살아보니 이제서야 제가 뭘 좋아하고 잘하는지 알겠더라고요. 저와 같은 경험을 더 많은 사람들이 겪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그 사람들이 주위의 ‘이상한 시선’에 시달리지 않았으면 좋겠고요. 초중고 나와서 취업하는 거 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건 절대 아니에요. 오히려 그런 이분법적인 방식이야말로 제가 싫어하는 ‘틀’에 가깝죠.


다만 모든 사람들이 더 과감하게 도전하고 더 많은 선택지를 가지게 되면 좋겠다는 거예요. 최종적인 선택이 초중고 나와서 취업을 하는 거라도 상관은 없죠. 그들 모두가 ‘잼있는 인생’을 살 수 있다면요. 점점 없어지는 직업도 많고, 평생직업 보다는 직업 다음의 삶에 대해 생각하는 시대가 왔잖아요.


잼있는인생 홈페이지 http://jaminlife.me  


기획·편집_고정은 (청년자치정부준비단 파트너)

인터뷰·글_한예섭

사진_김재기

세상은 이해하기 어려운 규칙들로 가득하다. 1980·90년대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기준, 과정, 결과들이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 여기 관성을 넘어 다른 시각으로, 기성세대가 이끄는 룰에서 벗어나 보다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 나가는 ‘빌더’들이 있다. 우리의 삶과 세상에 크고 작은 균열을 가져올 이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서핑과 위스키만으론 바뀌지 않는 당신의 삶에, 어딘가 색다른 균열이 생기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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