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규칙, 다른 서울 #02_혼익인간 이성휘
혼자 일하는 프리랜서 디자이너라고 하면 낭만적인 직업으로 보는 분들이 많아요. 직장인들보다는 시간관리가 자유로우니까 일단 부러워하죠. 또 내가 일할 양을 직접 선택한다는 게 큰 장점이기도 하고요. 저도 그래서 혼자 일하고 있어요. 그만큼 돈벌이가 적을 수는 있지만, 홀로 서는 초기에만 잘 버티면 일이 많이 들어오는 시기도 분명 있거든요.
그런데 그렇다고 이 일이 절대 낭만적이지만은 않아요.
계약서엔 왜 ‘디자이너 잘못’만 있나요?
먼저 ‘계약서’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요. 프리랜서 디자이너와 클라이언트 간 계약서를 보면 디자이너의 잘못, 디자이너의 책임만 쭉 쓰여져 있는 경우가 많아요. ‘디자이너가 작업물을 늦게 주면 안 된다’, ‘이러저러한 문제가 생기면 디자이너가 이러저러하게 책임을 져야 한다’, ‘창작물 저작권은 디자이너가 아닌 클라이언트가 가진다’. 이런 내용이 대부분이죠.
그런데 작업 과정에서 생기는 문제라는 게 꼭 디자이너 때문에 생기는 건 아니거든요. 오히려 클라이언트나 고객사가 잘못해서 벌어지는 일도 많은데, 일단 계약서에 사인을 해버리면 그런 것도 모두 디자이너의 잘못이 되어버려요.
작업물에 오타가 있다고 그걸 디자이너 책임으로 덮어씌운다든가 하는 일이요. 오타감수는 회사 쪽의 일이었는데! 아니면 원고를 마감 3일 전, 일주일 전에 보내 놓고 당장 디자인을 완성하라고 한다거나. 디자인 작업상 터무니없는 기간이거든요.
이렇게 클라이언트가 만들 수 있는 문제들은 계약서에 전혀 담기질 않아요.
디자이너 입장에선 이런 문제를 조금이라도 방지할 수 있는 계약을 해야 하는데, 저희처럼 혼자 일하는 사람들은 사실 계약을 할 때 무엇을 기준 삼아야하는 지도 잘 모르거든요. 계약서에 사인을 하면서도 내가 지금 이걸 제대로 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도 없는 게 현실이죠. 뭘 잘 알아도 계약 내용을 바꾸기는 힘들고요.
이미 완성된 계약서를 대표님 도장까지 딱 찍어서 가져오는데, 그걸 어떻게 다시 돌려보내요. 디자이너 개인 입장에선 당장 돈을 벌어야 하니 문제가 있어도 수긍하는 거예요. 그래서 생각했어요. 혼자 일하는 디자이너끼리도 ‘연대’가 필요하다고. 같이 고민하고 이야기를 나눠서 해결책을 내야 한다고.
혼자 일하는 디자이너를 위한 모임, 없어서 저희가 만들었어요.
주변에 저 같은 프리랜서 디자이너 몇 사람이 있어요. 비슷한 일을 하다 보니 서로 작업을 좀 봐주면서 교류하고 지냈죠. 자연스럽게 힘든 일, 고민되는 일도 털어놓고요. ‘계약서’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하고.
그러다 생각을 더 넓혀서, 우리처럼 혼자 일하는 디자이너들에게 뭐가 필요한지 고민하기 시작한 거예요. 언젠가는 아예 정책적인 변화까지 한 번 이끌어볼 수 없을까, 하면서 모임을 하나 만들었죠. 이른바 혼자 일하는 디자이너를 이롭게 하기 위한 모임, ‘혼익인간’.
프리랜서 디자이너를 위한 움직임이 아예 없던 건 아니에요. 2012년에 한 디자인협회가 표준계약서를 만들었더라고요. 살펴봤더니 내용도 상당히 괜찮았어요. 문제는 이게 강제성도 없고 하니 잘 쓰이지 않았다는 거죠. ‘혼익인간’의 1차 목표이자 고민은 분명해요. 디자이너들의 의견을 반영한 표준계약서를 만들어 ‘실제로 사용하게 하자’.
당장 여기저기 혼자 일하는 디자이너들을 수소문해 설문조사를 시작했어요. 총 150명 정도를 모았어요. 디자이너로서 얼마나 활동했는지, 가격을 책정할 땐 뭘 기준으로 하는지, 부당한 대우를 당한 적은 없는지, 그게 클라이언트의 잘못 때문인지. 일단 통계는 쫙 내놨는데, 앞으로의 활동은 이걸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렸겠죠.
그 해석을 바탕으로 더 심층적인 인터뷰, 토론회 같은 것도 진행할 생각이에요. 발표회도 열고, 이게 정책으로 나아갈 수 있게 여기저기 요구도 해야죠. 어떤 방법으로든 더 공정한 디자이너 표준 계약서를 만들 거예요. 그리고 서울시, 혹은 서울시 산하 기관들에서 쓰게 만들어야죠.
내가 선택한 길이라고 고되야 하나요?
디자이너 본업과 혼익인간 활동을 병행해야 하니 힘든 점도 있어요. 당장 시간도 부족하고요. 활동을 위한 안정적인 공간을 구하는 것도 일이고, 돈 문제도 있어요. 이런 활동한다고 누가 돈을 주는 건 아니니까. 멤버들 간에 갈등이 일어나기도 해요. 아무리 일이 바빠도 혼익인간 활동에 좀 더 집중해야 하는 거 아니냐, 아니다 생계활동이 더 급하지 않냐, 하면서요.
그래도 계속 활동을 하는 이유는 그냥 우리 모두 여유 있게 살아봤으면 싶어서요. 특히 디자이너들은 굉장히 가쁘게 작업하는 사람들이거든요. 디자인이 각종 작업의 최종 단계다 보니까. 언젠가부터 저도 막 숨이 차더라고요. 클라이언트 분들이 원고 좀 일찍 줬으면 좋겠고. 경제적인 부분도 그렇고. 같이 숨고를 수 있는 환경을 만들려고요.
아, 가끔은 그런 분들도 계세요. 너가 좋아서 시작한 프리랜서 일 아니냐고, 그럼 당연히 다른 직업보다 불리하고 부당한 일도 당할 수 있는 거 아니냐고. 저는 이렇게 다시 질문 드리고 싶네요. 나의 선택이 내가 직접 선택했다는 이유만으로 보호받지 못한다면, 그건 좀 옳지 못한 사회 아닌가요? 라고.
혼익인간 인스타그램 3graphicdesigner
혼익인간 페이스북 workaloneD
기획·편집_고정은 (청년자치정부준비단 파트너)
인터뷰·글_한예섭
사진_김재기
세상은 이해하기 어려운 규칙들로 가득하다. 1980·90년대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기준, 과정, 결과들이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 여기 관성을 넘어 다른 시각으로, 기성세대가 이끄는 룰에서 벗어나 보다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 나가는 ‘빌더’들이 있다. 우리의 삶과 세상에 크고 작은 균열을 가져올 이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서핑과 위스키만으론 바뀌지 않는 당신의 삶에, 어딘가 색다른 균열이 생기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