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이후줄곧 유전자와 개체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난 유전자의 지휘로 철저하게 움직이는 보잘것없는 개체일 뿐이다. 토론 후에 인간과 그들이 속한 삶, 그리고 중심에있는 자신에 대해 좀 더 이해하게 되었다고 스스로 세뇌하듯 반복적으로 말해왔다. 나와 남편, 나와 주변, 나의 또 다른 자아인 딸... 이제는 충분히 나를 이해하는 게 가능해졌다고.
해를 마무리하며 삶의허무나 의미 부여를 조금 더 생각하게 된다. 그럼에도 난 여전히 허무와 고독을 잡고 있다.몇 해 전부터 연말이면 허무가 깊어져 우울이 주변을 맴돌며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슬픔이 울적함으로 향하는 마음을 달래고 싶어서 이곳 독립 서점을 벗어나지 못하고 책을 뒤적이고 있다. 답답함이 해소되지 않고 그 감정이 연속되던 시간... 잠깐.. 그림책 하나가 내 눈길을 끌었다. 쪼그리고 앉아서 읽고 자세를 고쳐 서서 읽고 한참을 보았다. 그 사이 책에 묻혀있던 작가의 감정을 꺼내 읽었는지, 스토리에 더깊이 집중했는지,그림에서 의식 어딘가에 숨겨진 슬픔을 찾았는지 삶의 허와 실이 한꺼번에 찾아왔다. 다시 처음부터 책을 뒤적거리다 급기야 눈물을 흘렸다.한 번 시작된 눈물은 멈출 줄 몰랐다.볼을 타고 하염없이 내리던 눈물이 피부를 따갑게 파고들었다.
《나의 괴짜 친구에게》_고정순
너는 피아노를 연주할 때면 아버지가 만들어 준 키 작은 접이식 의자에만 앉았어.
사람들은 그 모습을 이상하게 바라보았지.
낡고 삐걱거리는 보잘것없는 의자에만 앉던 네가 괴짜처럼 보였나 봐.
나는 그 작은 의자를 섬세한 손길로 매만지던 네 모습을 잊을 수 없어.
(... 중략...)
환호와 박수 소리 대신 침묵과 고요 속에서 피아노의 노래를 듣고 싶었던 너.
모든 생명에게 저마다의 소리가 있다고 믿었던 너답게 말이야.
네가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순간에도 나는 너와 함께했지.
지금도 나는네가 연주하는 피아노 선율이 그리워.
나의 유일한 선율이 되어 준 나의 괴짜 친구에게...
너의 의자가.
《나의 괴짜 친구에게》 일부 발췌
나의 결핍일까. 각별한 사이였고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나에게 특별하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가끔 사로잡힌다. 의자와 괴짜 친구는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소중함으로 서로에게 각별한 의미가 되었다.
작가의 마음을 의자에게 이입해 단 하나의 하나뿐인 친구에게 말했다. 친구가 진심으로 말해 주었다. 삶의 변곡점을 맞닥뜨린 우리에게 그 길을 선택해도 괜찮다고 말했다. 가끔 그 길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했다. 사실, 시간이 지난 그때 그 지점에서 다시 길을 선택해야 한다면 조금은 가볍게, 좀 더 쉽게 길에 닿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좀 더 용기 내서 닿으라고. 그림책에서 긴 시간 헤매던 답을 찾은 거처럼 그 순간 설렘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
나는 뭔가에 집중하면 주변을 잘 보지 못한다. 때로는 의도적으로 세상과 척을 지기도 했고 관습에 지나치게 익숙한 그들을 경멸하기도 했다. 그렇게 주변인들과 방향이 다른 길을 걸었다. 같은 방향으로 향하던 내가 보이지만 그 끝에는 내가 없었다. 나의 존재가 사라졌다. 가끔 모두가 움직일 때 혼자 멍하니 서 있기도 했고 대부분 소속된 집단에 어울리지 못하고 튕겨져 나와 있기도 했다. 내가 사랑하는 책, 노트, 필기구 등 언제라도 나와 함께 했던 여러 가지를 떠올리며 나 역시 그들에게 애정과 사랑 그득한 친구가 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오늘 밤은 눈물을대신해 슬픔에 취한 나를 안도하게 했다. 그것들의기다림이 하염없이애잔하다. 소중한 책 노트 필기구에 내 호흡이 있으며 숨결이 느껴진다. 가끔 깊고 깊은 천둥소리처럼, 때로는 맥이 약한 나의 호흡처럼.
혼자 간직하고 있는 친애하는 나의 의자가 항상 나를 지켜주리라는 믿음이 오늘은 조금 덜 외롭게 한다. 수도 없는 삶의 모순 중 너무나 행복해서 그것이 슬픔의 감정으로 귀결되었다는 것만큼 나를 혼란스럽게 한 게 어디 또 있으랴.그리고오롯이 행복하다는 감정이 다시 슬픔까지 닿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