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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 한소 Dec 22. 2023

살아온 햇수, 사라지는 기억

특별한 기억에는 감정만이 남아있다

비를 타고 온 더 깊어진 추위는 눈을 통해 존재감을 확실하게 드러냈다. 예상하고 있었던 방향에서 바람을 타고 온 눈이 살짝 내려앉는다. 그날은 새벽부터 쭉 왔던 눈이 뭔가 좀 달랐다. 이전의 경쾌함을 잃었다. 가볍거나 포근하지 않았다. 습도를 더했는지 무게만 느껴졌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회색도시의 눈과 밀도와 습도가 닮아 있었다. 그 생각이 크게 자리하자 이제는 펑펑 쏟아지던 눈이 빨리 그치기를 바랐다. 프레임 바깥에서의 눈은  다른 눈에는 그렇게 비쳤다.


아파트 13층 높이에서는 1~7층 높이에서의 시선이 대부분 단절된다. 새벽은 오직 어둠만이 주변을 지키고 있다. 새벽이 저층에 비해 더 깊은 거처럼 적막이 고요함을 덮었다. 깊음이 다른 색으로 더 이상 덧씌워지지 않은 새벽《수학의 선물》과 독대하는 시간을 가졌다. 온전히 이 시간을 누리니 나와 각별한 인연을 만난 듯 이 순간이 무엇보다 소중하다.


삶을 지속하고 있는 현실에는 직선이 난무하다. 대부분의 삶의 길에서는 직선을 강조하고 강요받기에 이른다. 가끔은 주변을 살피려는 나의 호기심이 발동해서 굽은 선, 즉 곡선의 경로를 선택하기도 한다. 탈선하기도 하며 돌아가고 굴절하는 경험을 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나는 타자를, 그들의 삶을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직선이 나의 행동을 지배했다면 냉철한 이성은 가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정직하다고 떠들어대지만 돌아서 생각하고 우회하는 법을 전혀 몰랐을지도 모른다. 임의의 점과 임의의 점을 잇는 굽은 선으로 가능함을 보이고 싶다. 아주 가끔은 가능성을 보이고 싶다.


유클리드의 원론에 요청하고 싶다. 두 점 사이 직선을 긋는 것은 불가능한 요청이라 했다. 얼마나 견고하고 단단한 노력이 녹아 있어야 가능할까. 직선을 긋는다는 것. 자칫 흔들림을 들키고 농담이 눈에 띌까 두렵다. 나의 내면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은 창피함에 붉은 태양빛을 등지지 고 맞서서 눈부심으로 오히려 내면을 감추려고만 했다. 고민에 빠졌다. 태양과 맞서는 눈부심에 대하여 내 시선처리가 자연스러운지. 오늘은 태양을 등지고 있는 시선이 조금 더 편안했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삶에서는 왜 맞서려고만 했을까. 격렬하게 맞선 눈부심에 눈을 제대로 뜰 수도 없는데.


사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직선을 바라보며 '척'하며 살고 '척'하고 읽고 '척'으로 써온 자신을 돌아보니 답답한 숨이 쉬어진다. 나는 그렇게 세월에 당당하지도 그렇다고 용기가 앞서 나를 채워주지 않았기에. 다만 거침없는 거 같아도 천천히 흔들림을 이어나갈 뿐이다.


프레임 안에서 콩닥콩닥 두려움을 이겨내고 프레임 밖으로 서둘러 나간다. 뒤늦게 등교하느라 헐떡이는 숨으로 뛰던 한 학생과 마주쳤다. 그 아이는 앞으로 나있는 자신의 길을 내가 막아서기라도 한 거처럼 거친 숨소리를 내며 경멸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경멸은 학교인지 시간인지 늦게 나온 자신을 향한 분노인지 아주 짧은 시간 마주친 내가 대상인지 알 수 없었다. 뛰어가던 그 아이 뒤로 차가운 바람이 일었다. 학교로 들어가는 그 아이를 뒤로하고 다시 그 길과는 다른 나의 길을 걸었다.


팔랑 팔 바람에 실려 움직이던 눈발이 입술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입김과 함께 녹아내리는 눈은 얼굴을 쓰다듬는  팔 옷소매 끝에 닦여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12월이면 내가 움직이는 반경 어디에서나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 크리스마스가 캐럴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언제부턴가 그 흔적을 찾을 수도 기분을 느낄 수도 없다. 어디로 갔을까 하고 주위를 헤맨다. 그때마다 내 시선은 소리를 대체한 책으로 향했다. 책이 이어준 시각화된 카페 곳곳에 캐럴이 밝은 선율로 흐르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크리스마스를 노래하듯 잔잔히. 세상에서 가장 슬픈 캐럴은 어느덧 나를 아일랜드 서점으로 안내해 준다.

#크리스마스#캐럴#눈#겨울#섬에 있는 서점#마야



크리스마스면 어김없이 다시 읽고 싶은 책이 머리에 스친다. 《섬에 있는 서점》은 붉은색으로 채워진 표지 분위기만으로 리스마스가 생각난 것은 아니다. 가족의 사랑이 느껴지는 책, 마야와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을 파헤칠수록 두려움과 동시에 따뜻하고 포근함이 팽팽하다. 이번 크리스마스에 이 책이 더 그리운 이유는 지친 마음 때문일까? 고독을 즐긴다 하였지만 외로움이 짓누르고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없는 오늘 같은 날은 고독을 잠시 떠나보내고 싶다. 치열하였기에 고독은 세월에서 당연히 나를 성장시키는 요소였다. 상처가 많았기에 고독은 열심히 살아온 삶의 표상이었다. 무기력에 지친 슬픔이 진하게 남아 있기에 고독은 앞으로도 나의 동행이 될 거라 믿는다. 어쩌면 용기나 사랑보다 고독을 더 신뢰하고 의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짓눌린 외로움이 그렇게 큰지 몰랐다.


목적지를 바꿔가며 물결선 위로 넘어오지 못하는 감정을 끌어올렸다. 오늘 나는 변곡점에서 방향을 바꿨다. 일요일 오후, 쌀쌀해진 기온과 습도까지 불편했던 감정의 전환이 필요했다. 습도나 기온에 맞춰진 감정을 바꾸려고 공원을 돌며 쉼이 되는 시점을 찾으려고 했다. 바람에 기온에 세월에 감정이 스며들자 순서도의 출력값과 같이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요즘 들어 눈물은 혼자가 아니라 가끔 가슴을 꽉 매우기도 했고 호흡 곤란까지 찾아온다. 바람이 살갗을 아프게 긋고 있었다. 피부 곳곳이 빨갛게 아리고 달아올라 부끄럽고 고개 들지 못한다 해도 목적지가 바로 앞에 보이자 어느새 눈물은 입김과 함께 흐르다 일부는 바람을 타고 사라졌다. 소매 끝을 이용해서 꼼꼼히 닦아주면 깔끔하게 마무리된다.


현실에 지나치게 안주한다는 것은 동시에 일상적인 기억이 사라지는 것과 같다. 빛의 속도라고 했던가. 하루가 가속도가 붙은 듯 속도를 체크하기도 힘들다. 그렇게 보낸 하루를 감추고 삶의 햇수가 더해진다. 12월을 마무리하면서 살아온 햇수가 두려워진다. 사실, 가장 두려운 건 사라지는 기억이다. 살아온 햇수가 누적될수록 사라질 기억은 몇 배의 모순으로 자신을 놀라게 한다. 목요일쯤 지나면 일주일이 벌써 사라진 거처럼 머릿속은 무의 세계에서 좌표를 잃고 방황하며 자릿값을 찾아 헤맨다. 생의 절반쯤 경험하고 겪은 나의 기억이 어느덧 사라지는 거처럼 느껴진. 아직, 이제 겨우 절반인데 기억을 벌써 다 가져가는 것은 유전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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