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 한소 Dec 15. 2023

《이기적 유전자》유전자와 개체 사이에서  

유전자와 개체사이에서 겪는 모순

10년 전에도 지금도 난 여전히 유전자와 개체 사이에서 고민하며 방황하고 있다. 완벽하고 확실하게 이해한 거처럼 말하고 반응했다. 책을 읽은 자들은 그들이 유전자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거처럼 말한다. 난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헤매고 있는데...


처음 책을 접했을 때 충격적이었던 사실은 책을 마무리하며 덮는 순간에도 끝나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이해하고 수용한 개체와 유전자를 마지막까지 분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자신과 마주한 것이 가장 충격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조금 달라진 듯 보이지만 그걸 받아들이기에는 여전히 성장하지 못한 유전자의 역할이 큰 걸까? 나의 유전자가 그렇다고 했다. 그게 바로 자신의 한계인 거처럼 말한다. 가장 나답게 그렇게 진화해 왔다고. 염색체에 대해서도, 죄수의 게임에 대해서도, 밈에 대해서도, 문화적 진화가 되어버린 대부분의 밈을 이해했다.


책을 읽고 나눌 때 가끔은 자신을 보며 놀란다. 마치 만들어진 나를 바라보며 원래 내 유전자가 만들어 낸 자신의 모습을 가장 이상적인 자신이라고 착각하며 살아온 건 아닐까 하고. 책 전체, 도킨스의 논리를 어느 것 하나 이해하지 않은 건 없었다. 마찬가지로 그가 정리해 둔 수없이 많은 예시들 어느 것 하나 부족한 것이 없어 보였다. 그가 내놓은 이론과 예시들은 아직은 반박할 만한 것을 찾지 못했다. 간혹 갸우뚱하게 하는 것도 내 이론과 예시가 턱없이 부족하기에 의심에서 더 다가갈 수가 없었다. 


토론 전 날 밤 책을 읽고 마무리하며 근원으로 돌아가 보니 나는 처음부터 무너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유전자는 생존하려 오랜 세월에 거쳐 다른 유전자에 비해 조금 더 약하고 여리고 경계인의 시선에서 헤매듯 여전히 불편하고 불안해한다.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에너지를 쏟아왔다. 그런데 바꾸어 말하면 얼마나 다행인가. 나의 개체가 아닌 유전자는 불편하고 불안한 이 기운, 에너지를 끌어내려고  개체는 덤덤히 몸을 빌려줄 수 있는 기계로 각자의 자리를 지켜내어 다. 오늘 같은 토론 모임을 통해 내 유전자를 좀 더 이해하고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어 편안해졌다. 그건 어쩌면, 아무에게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행복의 특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많은 부분에서 불편하다. 개체가 아닌 유전자의 선택이라 하더라도. 나의 유전자는 욕망한다. 나의 유전자는 꿈꾼다. 경우에 따라서 기대와 더 나아가서는 희망으로 드러나는 꿈을. 


가끔 개체가 원하는 건지 유전자의 욕망인지 서로 다른 길 위에 마주하는 둘을 보며 본능과 직관도 유전자라면 개체로 다른 길을 걷고 있는 몸뚱이의 본심은 무엇이란 말인가. 내가 좀 더 단단하떳떳하며 당당해지기를.. 가끔 창의적인 생각에 푹 빠져 책을 읽고 논할 수 있도록. 수를 보면 편안하고 수가 갖는 의미나 수학적 사고는 나를 행복하게 하고 삶을 좀 더 풍요롭게 한다. 그것도 개체인 내가 아니라 유전자의 힘이라고 생각하니 유전자의 생존 기계인 몸이 덧없고 허무하게 느껴진다. 깃털처럼 가벼운 개체여, 너의 존재를 알고 있니? 다시 확인한다면 존재의 의미를 알고 있을까? 개체는 대답하지 않는다. 대답할 수 없다. 유전자 없이 개체는 강력한 에너지를 갖기도 힘을 발휘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호모 사피엔스인 인간만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고민하고 노력했으리라. 개체가 존재의 의미를 찾는 노력 또한 유전자가 하는 반복된 과정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도킨스가 말한 유전자 진화론은 유전자는 복제되며 진화하는 것이며 ESS (진화론적 안정된 전략) 쓰며 미래를 보지 못하지만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 사실, ESS는 개체가 유지될 수 있는 가장 안정된 전략이기에 강자나 우수한 유전자가 열성의 것을 물리치는 것도 아니며 흔히 얘기하는 먹이 사슬처럼 서로 간의 관계가 잘 유지되는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우수한 유전자가  그렇지 않은 것에 비해 살아남기 마련이다. 환경에 더 잘 적응한 그것들의 개체가 증가할 것으로 여겨지지만 ESS는 그것이 가장 안정된 전략으로 쓰이게 하며 균형을 잡아준다.


사실 나는 행운아다. 여러 책을 읽으며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와 만나게 된다며 당신도 행운아라 할 수 있다. 책을 읽고 다시 함께 책에 대해 나눈다면 우리 모두 행운아이다. 창조론을 부정하는 다윈과 그 뒤를 이은 창조론을 다시 부정하는 도킨스는 일부 기독교인이나 믿음을 온전히 믿는 사람들에게는 부정적 세계의 과학자일 뿐이다. 도킨스는 종교, 믿음을 밈이라는 하나의 문화로 규정하고 그것으로 발전을 읽었다. 책을 처음 접했을 때와는 분명 변화했다. 충격과 공포, 반감이 컸던 그때와 지금은 달라졌다. 물론 내면에 자리 잡은 충격과 공포는 여전히 있다. 그러나 지금은 책을 덮으며 머리로는 이해되지만 가슴으로 수용할 수 없었던 사실을 깨달음으로, 그런 부분까지도 나의 유전자를 돌아보게 되었다.


 감성적인 너무나도 감성적인 내가 수학을 가르치는 것도 나의 내면에 스며있는 가장 많이 복제된 유전자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덕분이리라.  문화적 진화를 깨닫는 순간 벌써 나의 변화는 시작되었다.


 "자기 복제자는 당신 안에도 내 안에도 있다. 그들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창조했다. 그들이 살아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우리가 존재하는 궁극적인 이론적 근거이기도 하다."


"우리는 유전자의 기계로 만들어졌고 밈의 기계로 자라났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리의 창조자에게 대항할 힘이 있다. 이 지구에서는 우리 인간만이 유일하게 이기적인 자기 복제자의 폭정에 반역할 수 있다."


지난 7화의 글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비교리즘>에서 보면 우리는 심리학 실험에서뿐만 아니라 실생활에서도 영합게임을 하고 있지 않으면서도 영합  게임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며 지낸다. 인간은 왜 도킨스의 이론, 그가 풀어낸 귀류법을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유전자의 이기적 면모라고 하기에는 지나친 안타까움이 따른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결핍에 따른 안타까움이 아닌 상대가 가진 것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은 처음부터 비영합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유기체인 인간은 영합 게임이라 여기며 그 속에서 방향을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다. 그것에서 인간의 모순의 순간과 마주했다. 그것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나의 모순을 보았다. 유전자와 개체에서 생존 기계일 뿐인 개체를 껍데기로 가지고서 불안정된 호흡으로 다시 모순의 자리에 서있다.

이전 07화 우리 사회 만연해 있는 비교리즘_그림 by규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