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비친 한 사람을 향한 사랑_상수 함수
f(x)=a, y=a (단, a는 상수)
위의 식을 보면 어떠한 x값에 대해서도 y의 값은 일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상수 함수를 보면 삶의 관계에서 맹목적 수용이 떠오른다.
함수의 세상에는 다채로운 그래프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좌표평면 여기저기에 있다. 물론, 직선과 곡선의 다양한 모습의 모든 그래프가 함수의 세상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함수의 검열에 걸려서 그저 주변을 맴돌고 있는 직선이나 곡선의 그래프가 눈에 띈다. x=a, y²=4px, x²+y²=r² 등의 그래프는 좌표평면 위에는 있으나 검열을 뚫고 함수의 세상에는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모습으로도 비교가 가능한 검열의 경계를 넘지 못하는 다양한 그래프를 살피며 타인과의 관계에서 우리의 삶의 방식이 답답했던 순간을 떠올려본다. 상수 함수 입장에서의 맹목적 수용이 어느 순간 자신을 지나치게 불편하게 했다. 질서로 위장한 그곳을 무질서의 편견과 선입견이 덮고 있었다.
맹목적 수용에서 맹목적이란 주관이나 원칙이 없이 덮어놓고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맹목적이란 단어 자체에 이미 편견이나 선입견이 들어가 있다. 원칙이나 생각 없이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 자체가 이미 기울어진 것은 아닐까. 의식이나 생각의 정체는 현실에서 피해야 할 큰 위험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정체한다 것보다 더 경계해야 할 것이 바로 맹목적 수용이다. 이것이야말로 현실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위험한 사랑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함수는 대응 관계이다.’ 정의역 각각의 원소에 대하여 공역의 원소가 오직 하나씩만 대응될 때의 관계를 함수라고 한다. 여러 가지 함수 중 일대일 함수, 항등 함수, 상수 함수, 일대일 대응 등에서 상수 함수를 생각하며 인간의 삶과 관계에서 사랑의 모습 중 무조건적 수용을 연계해 본다. 책을 읽으며 머릿속의 질서와 혼란을 확인해 보니 질서를 위장한 무질서가 꿈틀댄다. 혼란에서 부정적 차단보다 더 강력한 것이 번쩍인다. 결국 관계의 차단보다 더 경계해야 할 것은 바로 맹목적 수용이라는 생각이 든다.
f(x)=a (단, a는 상수)
f(x)=a는 x 축에 평행이며 y=a로 항상 일정하다. 이와 같은 상수 함수에서 x=a가 함수가 될 수 없는 건 x값 각각에 대하여 수많은 y의 값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y=a는 다양한 x값 각각에 대해 y 값이 하나로만 나타난다. 그때의 y 값이 매번 같을지라도. y=a와 같은 상수 함수 모양을 보며 반감이 든다. 관계에 있어서 타자의 맹목적 수용이 편안하지 않았고 생각의 정체보다 더 위험하다고 감지했었다. 상수 함수의 맹목적 수용에 대해 우리가 생각하는 보편적 수용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상수 함수에서 보여 준 맹목적 수용을 사랑이 가리고 잠시 혼란을 틈타 나온 질서처럼 위장하고 있는 무질서를 깨닫는 순간 현실의 관계가 제대로 보인다.
무조건적 수용은 상수 함수의 모든 y값과 같다. 그리고 서로 다른 x의 값은 항상 같은 y의 값이지만, y의 값 각각에 대응된다. 사랑으로 가려진 맹목적 수용은 질서가 있는 듯 답답하다. 그런데 사실 그것은 질서로 위장한 무질서였다. 질서가 있는 듯 꾸며진 대응 관계에서도 함수는 성립할까? 질서가 있는 듯 단출한 상수 함수는 그저 맹목적으로 수용을 한다. 이것이야말로 현실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사랑의 모습으로 보인다.
세계 여러 나라의 문화는 자국민들은 당연히 수용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기본 중의 기본적 자세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속에서도 자신의 기준과 판단은 확실해야 한다. 이처럼 맹목적 수용은 자칫 질서처럼 보이지만 사랑에 가려진 혼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상수 함수를 우리 문화에 적용할 만큼 함수의 단어가 주는 깊이만큼 깊게 느껴진다. 삶에 녹아있는 진정한 수학을 알아가고 그 세계에서 노닐 수 있기를.
x=a는 x값 하나에 수도 없이 많은 y 값이 대응된다. 지금 보니 확실히 y=a의 함수와는 구분되는 직선이다. x=a는 그것 자체만으로도 함수의 검열을 통과하기는 힘들다고 생각한다. 사랑에 가려진 혼란(y=a) 보다 더 큰 문제가 되는 건 한 나라에 태어난 자국민 각각의 생각은 다를 수 있다는 거다. 하지만 모두가 자신이 원하는 문화만을 제각각 고집(x=a)할 수는 없지 않을까. 다른 의식, 생각 등 수도 없이 많은 고집의 결괏값이 나온다면 그걸 하나로 뽑아서 유지하기는 어렵다.
함수의 정의에서 얻어지는 당연함과 그들 간의 연결로 나타나는 삶의 관계가 정체되지 않기를. 그것보다 맹목적으로 수용하지 않기를 바란다.
x=a와 y=a의 두 직선은 y축에 평행인 한 직선과 x축에 평행인 다른 한 개의 직선의 관계에 있다. 여기서 y=a의 직선만이 함수라 할 수 있다. 함수가 되기 위한 묵직한 의무를 x=a는 처음부터 저버렸다. 다만 스스로 편안한 방법으로 평면 좌표 위에 그려진다. 그렇게 하나의 x값에 수많은 y 값을 하나씩 대응했을 뿐이다. x값 하나에 대하여 수도 없이 많은 y 값이 존재하는 직선은 결국 선택의 책임을 저버렸기에 함수가 될 수 없었다. 이제, x=a의 직선은 x값 하나에 대해서 수없이 많이 나타나는 y 값의 자취, 흔적으로 y축에 평행한 직선의 모습을 하고 있을 뿐이다. 시계 방향이나 반대 방향으로 90° 회전한 y=a의 그래프를 닿지 않은 거리에서 그리워하며 애잔하게 바라볼 뿐이다.
함수이기를 포기한 x=a의 비애가 모순처럼 느껴진다.
상수 함수 y=a가 보인 맹목적 수용의 위험한 경고가 와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