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없는 자들의 초상

by 말하는 돌

빛이 꺼지고 난 자리에는

바람만이 오래된 시간을 헤아리고 있었다.

부서진 흙바닥 위에 남은 한 줄기 색의 흔적이

사라진 존재들의 자취를 더듬고 있었다.


누군가는 분명 여기서 살았고,

누군가는 그 이름을 불러주었을 것이다.

그 이름들은 지워지고, 얼굴은 먼지 속으로 떨어졌다.

끌려간 사람도 있었고, 말을 잃은 채 어둠으로 스며든 사람도 있었다.


어떤 얼굴은 시선을 잃었고,

어떤 얼굴은 말할 틈조차 잃어버렸다.

이제 남은 것은 몸이라 부르기에도 애매한 조각 같은 기억뿐이다.


그런데도 그 잔해는 묘하게 살아 있다.

피는 멎었지만 맥이 뛰는 듯하고,

숨은 끊겼지만 바람처럼 낮게 울린다.


지워진 눈이 묻는다.

나는 누구였을까.


파낸 듯 깊은 공백 속에서

오히려 우리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빈자리가 죽은 자와 남겨진 자를 잇는 가장 아픈 틈이 된다.


상처만 남은 세계에서 형체는 더 이상 개별의 초상이 아니다.

비슷비슷한 잔흔들이 겹쳐져 하나의 커다란 침묵이 된다.


그 침묵은 무게가 되어 어깨를 누르고, 빛보다 날카롭게 눈을 흔든다.

긁힌 자국, 까맣게 그을린 재, 비에 젖어 부서진 흙은

천천히 모양을 다시 만들며 속삭인다.


여기, 누가 분명히 있었다.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죽음조차 기록되지 않은 이들.

그들의 빈자리는 다시 한 번 우리를 향해 말없이 손을 뻗는다.


나를 바라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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