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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희 Mar 31. 2017

슬링스톤(Sling Stone), 비우고 다시 채우기

17-18 F/W 헤라 서울 패션위크

2017.3.30

Photo : 박주민 블로거


패션위크 런웨이 리뷰 : 슬링스톤(Sling Stone)


감당하기 힘든 혼란이나 슬픔에 처했을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작은 세리머니(Ceremony), 즉, 의식(儀式)이다. 사랑하는 이가 세상을 떠났을 때, 우리는 ‘장례’라는 의식을 통해 ‘떠나보낸다는 것’과 ‘남는다는 것’의 의미를 깨닫는다. 또한 역경에 처했을 때에도 우리는 ‘기도’라는 의식을 통해 견디고 헤쳐나갈 힘을 얻는다.  


오늘 밤 Max Style 앞에서 펼쳐진 슬링스톤의 쇼는 바로 그런 세리머니 중 하나였다. 디자이너 박종철은 혼란으로 가득 찬 시대의 한 복판에서 The Restoration(복원, 복구)라는 주제로 작은 의식을 거행했다.



사운드트랙은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메인 테마(Theme from Schindler's List)였다. 아이작 펄만((Itzhak Perlman)'이 연주하는 장중하고 처연한 바이올린의 음률을 따라 슬링스톤의 올블랙 컬렉션(All Black Collection)이 느린 템포로 전개되었다.


스타일들은 슬링스톤의 시그너쳐인 모던 프록코우트(frockcoat)와 에이프런 레이어드(Apron-layered) 팬츠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플랫(flat)하게 재단된 가방과 가죽 재킷, 루즈한 니트, 퍼 베스트 들이 트렌디한 악센트로 가미되었다. 모두가 오버사이즈로 흐르는 시대에서 슬링스톤 특유의 낮고 좁게 재단된 어깨는 유니크한 빛을 발했고, 도트 패턴들이 조용한 톤으로 스타일들을 장식했다.   



현재 우리가 처한 정치-경제적 상황 때문이었을까.

무언(無言)의 시크한 행진, 슬픈 선율, 블랙 컬러들과 함께 몇몇 모델들의 눈에 흐르는 눈물 혹은 눈물 같은 메이크업이 등장하자 깊은 곳으로부터 감성적 공감이 밀려왔다. 마치 쇼 자체가, 복원을 위해서는 먼저 다 비우고 게워내야 한다며 보는 이들의 등을 두드리는 것 같았다.


박종철은 한 노년의 여성을 모델로 캐스팅했다. 크고 마르고 젊은 모델들 사이로 딱 한번 걸어 나온 우아한 노년의 여성은 존재 자체로 강렬한 메시지를 던졌다.   



화려한 볼거리도, 눈에 띄는 기교도, 과장된 디자인도 없는 클래식한 쇼였다. 아방가르드와 펑크, 변화, 새로운 시도는 언제나 우리를 벅차고 가슴 뛰게 만들지만, 그런 변화 속에 승자는 언제나 소수인 법이다.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느끼고 있을 가슴 한 켠의 불안, 그 치유의 시작은 변화보다 먼저 스스로를 복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Max Style 정문 앞에 자리한 슬링스톤의 런웨이 옆으로는 차가 달리고 사람이 지나는 서울의 일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를 배경으로 그려진 슬링스톤의 쇼는 서울의 반짝이는 밤거리 한복판에서 세상을 향해 던지는 굵고 담담한 위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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