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삶이란 무엇인가
미움받을 용기란 책의 인기가 대단하다. 52주째 베스트셀러 행진을 기록한 뒤에도 이 책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는다. 이 책의 매력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철학자와 청년의 대화로 풀어나간 이 책에는 그런 구절이 있다.
“'자기긍정'이 아니라 '자기 수용'을 해야 하네. 자기긍정이란, 하지도 못하면서 '나는 할 수 있다'라고 주문을 거는 걸세. 이는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삶의 방식이지. 한편 자기 수용이란, '하지 못하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할 수 있을 때까지 앞으로 나아가는 걸세.”
자기긍정은 때때로 자신을 부정하고 싶을 때, 혹은 자신이 속한 상황을 부정하고 싶을 때 나타난다. 적은 월급을 탈탈 털어 명품백을 사는 가난한 여종업원, 번번이 입사시험에 떨어지면서 '나는 할 수 있어'라 되뇌는 취준생들. 어쩌면 이들에게 너는 자기 긍정이 아니라 자기 수용을 해야 해라고 말하는 건 잔인한 일일지 모른다.
100여 년 전 프랑스에는 한 꿈 많고 가난한 소녀가 있었다. 고아원에서 배운 바느질 덕에 겨우 입에 풀칠은 할 수 있었지만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었던 그녀는 밤이면 카바레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녀는 거기서 돈 많은 남자의 애인이 된다. 그리고 곧 그를 따라 파리 근교 그의 목장에서 지내게 된다.
당시 부유한 남자의 저택에 정부(情婦)들이 머무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간혹 그 저택을 방문하는 상류층의 여성들과 마주쳤을 때, 기죽지 않기 위해 정부들은 훨씬 더 부티 나고 화려한 복장으로 스스로를 치장했다.
특별한 사람이길 원했던 영리한 흙수저 아가씨에게, 금수저들과 비교당하는 이런 상황들은 어떤 기분을 안겨다 주었을까. 그녀는 다른 정부들처럼 상류층 여성들을 흉내 내지 않았다. 그녀는 스스로가 디자이너가 되어 전혀 다른 옷들을 만들어 내놓기 시작한다.
그녀에겐 자신이 속했던 싸구려 세계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재능이 있었다. ‘저어지’는 당시 남자들의 겨울 속옷에나 쓰이던 초라하고 싼 원단으로, 상류층 여성들과는 연관 짓기 어려운 소재였다. 그러나 그녀는 과감히 저어지로 여성 슈트를 만들고, 스스로가 모델이 되어 자신감 있게 입고 다녔다. 이 슈트는 곧 파리의 큰 유행으로 자리 잡는다. 그녀가 바로 우리가 샤넬이란 이름으로 기억하는 세기의 디자이너 가브리엘 샤넬(Gabrielle Bonheur Chanel)이다.
샤넬은 한 때 보석에 심취했다. 그러나 이때에도 다이아몬드의 등급을 따지고 정교한 디자인을 논하는 정통 보석의 세계에는 발을 들이지 않았다. 샤넬의 길은 최상급 보석을 예술정신으로 가다듬는 까르띠에(Cartier)의 길과는 달랐다. 그녀는 가짜 보석들을 잔뜩 디자인한 뒤 자신의 고객들에게 무료로 나눠주었다. 마치 세상을 향해 '꼭 그런 걸로 밖에 멋을 못 내는 거야?'라는 당돌한 질문을 던지듯 말이다.
이런 샤넬의 성공적인 삶은 과연 그녀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었을까? 샤넬은 불행히도 그다지 행복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세상을 떠나기 전 그녀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행복한 순간이 없었다’고 했다.
샤넬의 연이은 성공이 지속되고 있을 무렵, 유럽에선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샤넬은 다른 이들이 피난을 떠나는 와중에도 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리츠칼튼에 머물며 종전을 기다렸지만, 파리에는 곧 독일군이 들이닥쳤다. 하지만 샤넬은 그리 당황하지 않았다. 그녀는 또 스스럼없이 독일 장교들과 친분을 쌓았고 자연스럽게 나치의 스파이로 활동하게 된다.
샤넬에게 프랑스란, 파리란, 그리고 자신의 친구이자 고객이었던 프랑스인들이란 대체 어떤 의미였던 걸까. 그녀가 이들에게 소속감이나 책임감을 느끼기엔 어린날의 삶이 너무도 외롭고 척박했던 걸까. 그래서 그녀의 이런 이기심은 어쩌면 인간으로서 이해할 수밖에 없는 부분일까.
미움받을 용기에서는 이런 생각을 전면으로 부정한다. 이 책의 철학자는 도리어, '과거의 삶이 주는 트라우마가 우리의 미래를 결정해버려서, 아무런 노력도 소용없다'는 그런 가치관을 어떻게 용납할 수 있는지 묻는다. 누군가 당신의 삶이 그렇게 규정하도록 정녕 내버려 두고 싶은 거냐고 말이다.
요즘 '헬조선'이란 말 뒤에는 언제나 흙수저, 금수저 같은 단어가 따라다닌다. 흙수저로 태어난 젊은이들의 탄식은 너무도 슬프게 들린다. '흙수저=불행의 시작'이라는 말은 아들러(이 책은 아들러의 심리학을 다룬다)에 의하면 사실이 아니다. 그들이 부자가 될 수 있을지는 단언하게 어렵겠지만, 이 책의 철학자는 단언하건대, 한 명도 예외 없이, 누구나 지금 당장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행복이란 무얼까. 애덤 스미스(Adam Smith)는 행복은 타인으로부터 사랑받는다는 느낌으로부터 출발한다고 했다. 그리고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처럼 보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동시에 타인의 행복을 바라는 존재라 말했다. 우리는 가정이나 회사에서 기꺼이 환영받고 사랑받는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이 책에는 언뜻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보이는 도덕책 같은 문구도 있다.
" 소속감이란, 태어나면서부터 주어 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획득하는 것일세. 공동체 감각(소속감)에는 '타자 공헌'이 필요하다네. 친구인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해주는 것. 그것이 '타자 공헌'일세. 우리는 자신의 존재나 행동이 공동체에 유익하다고 생각했을 때에만, 다시 말해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라고 여겨질 때에만 자신의 가치를 실감할 수 있네"
이 말들은 사실일까. 남에게 이로운 무언가를 할 때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거짓말 같은 말. 이렇게 살다 간 손해만 보는 바보가 될 것 같아 무시해버리고 싶은 이 말속에 나의 행복의 열쇠가 과연 들어있을까. 아마 샤넬은 이런 말들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마음껏 영리하게 살았고 대단한 것들을 이루었지만 행복은 얻지 못했다.
미움받을 용기를 갖기 위해선 어쩌면 '손해 볼 용기'가 먼저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살아갈지는 우리들 각자의 선택이지만 한 번쯤은 걸음을 멈추고 삶에 대해 진지하게 질문을 던져볼 필요도 있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