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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희 Oct 18. 2016

밥딜런과 노벨상,
파격의 시대를 살아가는 법

 ‘LVMH prize(루이비통 상)’의 시대 

2016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는 미국의 포크 가수 밥 딜런(Bob Dylan)’으로 발표됐다. 이 발표는 금세 논란에 휩싸였다. 누군가는 탁월한 선택이라 입을 모아 축하했고, 누군가는 대중가수가 노벨상을 수상한다는 것은 순수문학의 입지를 축소시키는 게 아닌가 염려했다. 

이 수상이 과연 긍정적인 것인지 섣부른 것인지는 아무나 판단할 사안이 아닌 듯하다. 이에 대해 평가를 내리려면 우선 밥 딜런의 가사가 영시(英詩)적 입장에서 갖는 가치와 시대적 의미들을 정확히 이해해야 할 테니 말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서건 이 수상이 우리에게 한 가지 의미 있는 시사점을 던지고 있음은 분명하다. 이런 선택이 가능했다는 것, 그리고 이 선택을 환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파격의 시대 한 복판을 지나고 있음을 의미한다는 것 말이다. 

파격(破格)이란 격식을 깨뜨린다는 뜻이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클래식의 미덕을 해치는 것으로 보이지만, 어떤 면에서 이것은 이제 더 이상 들어맞지 않는 고루한 격식들을 버린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패션에서도 지금 이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중이다. 패션에도 ‘하이패션’과 ‘스트리트 패션’이라는 미묘한 레벨 차이가 늘 존재해왔다. 빗대어 말하자면, 샤넬, 에르메스, 루이뷔통 같은 하이패션은 ‘순수예술’이며, 스트리트 패션은 ‘대중문화’ 같은 존재인 셈인데, 누군가 정확히 이야기하지는 않아도, 이 두 패션 간의 수준 차이가 있다는 생각들이 늘 저변에 깔려있었다. 

하이패션에서 톱 디자이너의 길을 가려면, 디자이너들에겐 정해진 루트 같은 것이 있었다. 적어도 세인트마틴이나 파슨즈급의 유명학교를 나와 유명 디자이너 밑에서 어시스턴트를 거친 뒤, 정식 디자이너로 발탁되어 두각을 나타내거나, 독립하여 자신의 쇼를 열고 성공해야 한다.

때로 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데뷔하거나, 유명 디자이너 밑에서 어시스턴트로 일했으되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디자이너의 경우는 하이패션에선 ‘듣보잡’ 취급을 받았다. 이들은 스트리트 패션을 디자인할 수는 있지만, 하이패션 디자이너가 될 리는 만무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하이패션과 스트리트 패션의 수준 차이에 대한 개념(hierarchy)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이패션은 더 이상 ‘입고 싶지만 돈이 없어서 못 입는’ 옷이 아니라, 이제는 ‘돈이 있어도 사지 않을’ 옷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소비자들은 유려하게 정돈된 하이패션 보다 스트리트 패션이 주는 풍부한 재미와 변화, 혁신성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여기엔 인터넷과 SNS의 보급이 큰 역할을 했다. 과거엔 유명 패션 잡지들이 ‘무엇이 패션인가’를 정의하는 역할을 독점적으로 수행했다. 이들은 하이패션을 중심으로 하는 수준 높은 트렌드를 주로 다루었고, 일반인들에게 이것은 아무나 이해하지 못할 성역으로 비추어졌다. 그리고 이 시기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패션이 매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소수만이 누릴 수 있는 것들에 흠모의 마음을 잘 품지 않는다. 그러기엔 자신도 즐길 수 있는 것들이 너무나 풍요롭게 제안되는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무엇이 패션인가를 정의하는 역할은 많은 인터넷 매체들과 패션 블로거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이들은 하이패션이건, 대중적 브랜드 옷이건, 동대문 옷이건 별로 따지지 않는다. 이들은 하이패션의 체계와 정신, 역사를 배운 적도 없으며, 그런 것에 딱히 큰 관심도 없을 뿐 아니라, 자신이 왜 그런 것을 먼저 이해해야 하는지도 납득하지 않는다. 자신을 따르는 팔로워들에게 그저 자신이 예뻐 보이는 옷들을 소개할 뿐이다. 

이들의 말에는 그래서 대중적인 설득력이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소개에는 무수히 많은, ‘나도 살 수 있는’ 가격대의 제품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대중들은 자연스럽게 흠모의 마음을 버리고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세상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하이패션 하우스들도 이런 변화를 감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은 패션계를 주름잡아온 대가(大家) 답게 유연한 자세로 이런 트렌드를 받아들였다. 이들은 요즘 유명 패션 블로거들을 자신의 패션쇼에 초대해 다른 유명인사들과 나란히 앉히고 있으며, 스트리트 패션 쪽의 디자이너들을 디렉터로 적극적으로 영입하고 있다.

안나윈투어, 수지멘키스와 나란히 앉은 패션 블로거들, New York Times

2011년, 겐조(Kenzo)에서는 스트리트 패션에서 꽤 유명한 오프닝 세리머니(OpeningCeremony)의 두 CEO 디렉터 캐럴 림과 움베르토 레옹을 겐조의 수장 자리에 앉혔다. 올 초에는 발렌시아가(Balenciaga)에서 ‘베트멍(Vetements)’이란 스트리트 브랜드 디자이너 뎀나 즈바살리아(DemnaGvasalia))를 영입하더니, DKNY 또한 퍼블릭스쿨(Public School)의 디자이너 듀오를 새 디렉터로 임명했다.  이제 하이패션의 수장이 되는 지름길은, 그 세계에서 고루한 길을 밟기보다는 어쩌면 스트리트에서 재빨리 성공하는 게 나을지도 모를 일이다. 


가장 혁신적인 행보는 루이비통을 소유한 LVMH에서 나왔다. LVMH는 2013년 ‘LVMH prize’를런칭했다. 이는 젊은 패션 디자이너들에게 주어지는 상으로, 신진 디자이너(스트리트 패션 디자이너) 중에 매년 그 후보들을 선정해 발표한 뒤, LVMH 소속의 탑 디자이너들이 심사위원이 되어 한 명의 위너를 선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LVMH prize 2016 후보들, 수상자는 Grace Wales Bonne(최하단 정중앙)가 차지했다. 

3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여파는 대단하다. 신진 디자이너로서는 일단 그 후보 리스트에 노미네이트 된 것만으로도 많은 바이어들의 주목을 받는 후광을 입었고, 수상자에게는 30만 유로(3억 7천만 원 상당)의 상금과 LVMH의 멘토십이 함께 부여된다. 기존의 하이패션이 후배 디자이너에게 베풀 수 있는 모든 혜택이 담겨있는 선물인 셈이다.

LVMH 입장에서도 이 전략은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은 묘수였다. 루이 뷔통이란 최고의 클래식 하우스에 함부로 스트리트 패션 디자이너를 영입하는 모험을 피하면서도, 자신과는 상관없이 성장해 온 스트리트 패션이지만  그 세계와 단박에 친해지는, 나아가 그 세계를 자신의 휘하로 불러들이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얻은 셈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이 유서 깊은 기업이 파격의 시대에 대처하는 자세는 거의 완벽해 보인다.

LVMH 2016 수상 현장.  Not Just a Label( 본 상이 단순한 수상이 아니라, 현대패션을 발굴하고 지원하는 시스템이란 뜻)이란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파격의 시대에 가장 곤란한 입장에 놓인 사람들이라면, 성실하게 주어진 루트를 밟아가던 사람들이 아닐까 한다. 때때로 어떤 성실한 사람들은 권위를 너무 믿은 나머지 스스로의 눈으로 세상을 똑바로 판단하는 능력을 배우지 못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좋은 학교를 나오면 좋은 직장을 구해 안정되게 살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 그 루트에 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 그 루트에 포함되지 못해 절망한 사람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파격의 시대에 이들이 목매고 있는 스탠더드는 과연 얼마나 유효한 것일까?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는 누구에게나 공통된 고민이다. 오래전 공자의 한 일화에서 우리는 그 비슷한 답을 찾을 수 있다.    

공자는 어느 날 길을 가다 폭포 아래 흐르는 40리나 되는 급류를 만났다. 이 곳은 물살이 너무 거세고 물길을 예측할 수 없어 물고기나 자라도 헤엄치기 힘들다는 곳이었다. 그런데 공자는 여기서 유유히 헤엄치는 한 남자를 보게 된다. 깜짝 놀란 공자는 그에게 다가가 이런 급류에서 어떻게 그렇게 잘 헤엄칠 수 있느냐 물었다.

그 남자의 대답은 이러했다. 자신에게 특별한 비결은 없단다. 단지 물살에 자신을 맡기는 것, 즉, 소용돌이와 함께 물속으로 들어가고, 솟아오르는 물결에 따라 물 위로 나올 뿐이라고 말이다. 아울러 그는 자신은 물에서 태어나고 자라 이런 자연의 이치를 습성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급류가 휘몰아치는 강을 헤엄치는 방법은 급류에 몸을 맡기는 방법밖에 없다는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리고 이런 모험이 성공하려면 그는 직접 물에 몸을 담그고 몸에 익을 때까지 급류를 타본 사람이어야 한다. 


학벌이나 스펙, 좋은 직장을 ‘물에 몸 담그지 않을 방법’으로 찾고 있는 사람들은 어차피 이 시대와는 어딘가 어긋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격변의 시대에 그가 획득해야 할 것은 어떤 격변에도 시달리지 않을 안전한 자리들이 아니라, 그런 격변을 헤엄칠 수 있는 습성이어야 한다. 누군가는 이런 습성을 '창의력'이라 말하고, 누군가는 이런 습성을 '인문학'이라 말한다. 요는, ‘당신에게는 이 시대가 당신의 눈으로 똑바로 읽히는가’란 점이다. 인문학적 교양과 창의력은 모두 이 시대를 자신의 눈으로 똑바로 보고 헤쳐나가기 위한 도구들이다. 

파격의 시대를 살아가는 순리(順理)란무엇일까. 어떤 사람들은 이런 시대의 파도에 직접 올라타서 또 한 번의 기회를 보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이런 파도에 희생될까 두려워하며 산다. 우리는 둘 중에 어떤 모습으로 살고 싶은가? 그리고 우리의 아이들은 장차 어떤 모습으로 살기를 바라는가? 이에 대해 답해가는 과정이 삶의 태도나 교육 방식을 정하는 하나의 지표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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