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으로서의 글쓰기
한국으로 돌아와서 가장 행복한 하루였다. 비가 흩뿌려 거리에 노란 은행나무잎이 수북이 쌓인 늦가을의 인사동을 걸을 수 있다는 사실에 내가 한국으로 돌아왔음을 온몸으로 느낀다. 인사동을 포함해, 익선동, 삼청동, 남산 가리지 않고 걸어 다녔던 내 젊은 시절의 거리들이 오늘 하루 종일 내게 행복 세포를 일깨우며 알알이 내 기억을 되살려준다.
늦은 밤까지 스산한 거리를 돌아다니다 집에 돌아와 따스한 차 한잔을 앞에 놓고 쟈크 오펜바흐(Jacques Offenbach)의 ‘재클린의 눈물(Les Larmes de Jacqueline: Jacqueline’s Tear)’을 듣고 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들린다. 인사동의 갤러리들을 투어 하며 화가들의 작품들을 들러보고 그들의 예술혼을 느껴본다.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내딛는 풋풋한 새내기 예술가들의 공예품부터 사진작가의 작품, 회화 작가의 전시회와 컬렉터의 소장품 전시회, 이국적인 아프리카 화가들의 초대전까지 이곳 인사동에선 예술작품이 펄덕 거리며 살아 숨 쉰다.
늦가을 비로 정취에 흠뻑 젖어 인사동 길가에 청사초롱 불이 밝혀진 것을 보고서야 ‘아!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구나…’ 현실로 돌아온다. 내가 원하는 삶, 원했던 삶, 이렇게 살고 싶다.
이날은 마침 13일부터 전시되는 동덕여대 디지털공예과 학생들이 졸업 작품전 디스플레이 준비가 막바지에 달했던 터라 새내기 작가들과 직접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게 됐다. 비교적 무난한 작품들 속에서 내 시선을 잡아끌게 하는 두 작품을 소개한다.
아우라(Aura)를 설명하는 긴 자기 고백이 인상적이다. 하지만 이 새내기 예술가의 작품을 눈여겨보게 된 데에는 단순히 금속공예로서의 장신구가 특이해서라기 보다 이를 응용해 스타일한 이 친구의 센스가 놀라웠다. 대학 졸업반 학생이라고 하기에는 나름 신선하고 디테일하게 연출한 센스가 눈길을 끌었다.
작품을 둘러보며 갤러리를 떠날 때 난 이 어리고 순수해 보이는 친구에게 "스타일리스트를 꿈꿔보면 좋을 것 같다" 이 한 마디를 던지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워줬다. 앞으로 이 친구의 이름이 이쪽 계통에서 입에 올려지는지 한번 지켜볼 예정이다.
흑토로 덮인 바이올린이 눈에 들어왔다. 자세히 살펴보니 바이올린 나무통 겉면에 고뇌하는 인간들의 다양한 표정들의 부조가 특이하다. 연주를 하면서 겪었을 고뇌들일까? 얼굴 표정과 함께 다섯 손가락이 군데군데 배치돼있다.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겪었을 온갖 고통과 스트레스가 '스윽' 가슴으로 들어온다.
조카가 바이올린을 배울 때 겪었던 스트레스가 갑자기 생생하게 살아났기 때문이다. 본인의 의지와 열정에 의해서가 아닌 부모의 일방적 지시에 의한 예체능 교육은 부모와 자식 관계를 파탄시키는 지름길이다.
내 조카는 10여 년을 바이올린 레슨을 받으며 내심 대학에서도 음악을 전공할 결심으로 연주자를 꿈꿨던 아이다. 한데 학교 오케스트라에서 제1바이올린 주자에서 밀려나 제2바이올린 주자가 됐을 때 극심한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열 손가락 손톱을 물어뜯어 피를 철철 흘렸다.
피를 철철 흘리니 바이올린 레슨을 받을 수도 없고 열 손가락을 붕대로 칭칭 감아두자 이제는 발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도대체 어떤 자세를 취해야 스스로 발톱을 물어뜯을 수 있지? 가족들의 걱정을 온몸으로 받아내더니만 결국 이 집안의 평화는 부모가 아들의 음악 교육을 포기하면서 다시 찾아들었다.
이 작품을 보는 순간 난 열 손가락을 물어뜯어 피를 흘리던 조카의 손가락이 생각났고 마치 뭉크의 절규처럼 소리를 질러대는 흑토를 보며 연주자들이 받았을 그 스트레스와 절규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현의 튕김으로 소리를 내는 악기가 거부하는 연주' 아마도 반어법적인 의미를 담은 작품명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이 역시 대학 졸업반 학생의 작품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도록 철학적이라 한참을 머물며 절규하는 흑토 부조를 유심히 지켜봤다. 고통스러운 외침이 들려오는 듯해서 가슴이 저민다.
이노 갤러리에서는 우석대학교 기계 자동차공학과의 교수인 이재권 사진작가가 카메라에 담은 호남의 전경이 ‘호남 만경’이란 타이틀로 사진전이 열리고 있었다. 이과 출신으로 기계 자동차공학과의 교수로 있으면서 사진작가에 가수로도 활동하신단다. 오프닝 리셉션에 참석하면 김광석의 노래를 직접 기타를 연주하며 멋지게 불러주실 테니 꼭 참석해보라는 갤러리 관장님의 조언이다. 참석할 수 없음이 아쉽다.
이노 갤러리 2층에 위치한 갤러리 바이올렛에서는 ‘낯빛’이란 주제로 최은경 회화전이 전시되며 작가가 관람객들을 맞아 작품 설명에 나섰다.
인사동 길을 향해 큰 유리창을 낸 갤러리로 독특한 갤러리 이즈(IS)에서는 토끼 화가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홍정애 작가의 개인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아리수 갤러리를 거쳐 마루 갤러리 지하 1층 특별관에서 열리고 있는 아프리카 작가 초대전은 오늘 인사동 갤러리 투어의 단연코 백미였다. 통큰 갤러리가 소장한 아프리카 작가들의 작품을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었는데 한국에서는 쉽게 접할 수 있는 작품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희소성과 이국적 풍경이 투어 참가자들의 입을 벌어지게 만들었다.
카메룬 작가 음파두(Joel Mpahdooh), 탄자니아 작가 부쉬, 세네갈 작가 두츠, 탄자니아 작가 헨드릭, 탄자니아 작가인 팅가팅가, 세네갈 작가 아산닝, 케냐 작가 카툰 등의 작품이 전시돼있다. 사진 몇 장을 투척해본다.
나른한 인생이 지겨운 이, 오늘 당장 인사동으로 달려갈 것! 떨어지는 노란 은행잎을 밟으며 갤러리를 방문하는 것만으로도 오늘 하루 이렇듯 행복한 날, 우리 인생의 앞날에 그 무엇이 무서울까? 난, 이제 나에게만 집중할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