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alee Dec 12. 2019

소통의 즐거움을 깨닫다

힐링으로서의 글쓰기

난 내 인생을 태어난 후 10살까지와 죽기 전 마지막을 연산해서 각각 10년을 제외하고 20년씩을 연대기로 나눠서 전반기, 중반기, 후반기를 나눈다. 즉 10대와 20대를 내 인생의 전반기, 30대와 40대를 인생의 중반기, 50대와 60대를 인생의 후반기로 생각하는 것이다.


어떤 책이나 학자들이 말하는 것도 아닌 그저 나만의 내 인생 연대기 구분법인 셈인데 인생을 이렇게 나누는 것에는 나의 소멸과 죽음에 대한 나름대로(?) 기준과 소망이 반영되어 있다. 이 세상에서 삶의 시작은 나의 의지로 획득된 것이 아니지만 자연으로 돌아감은 나의 의지로 건강하게 자아가 깨어있는 상태로, 그렇게 마무리하고 싶다는 생각은 오래된 나의 바람이었다.



내가 목표로 하는 자연으로의 귀환은 80세이다. 내가 작성한 이 구분법에는 다분히 자아로서의 각성이 중요 기준인데 나 스스로 구분한 나의 삶 속에서 현재 나는 인생 후반기 1악장을 끝내고 있다.  인생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난 근 30년을 해왔던 직장 생활에 큰 스트레스를 받았다.


열심히 일한다고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사업체는 안정이 되지 않았다. 결국 불안정한 사업체를 이끌어가기 위해 매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자금 순환을 위해 단발성 사업에 매달려야 했다. 이런 소모적인 인간관계들과 이벤트성 사업은 결국 내가 갖고 있던 그나마 작은 재능(?)과 열정을 바닥나게 만들었다. 우물에 물 한 방울 남지 않아 매일 두레박을 긁어대며 제살을 파먹으며 살고 있는 나의 모습이라니…


인생 후반기 1악장이 끝나갈 무렵 서울 50 플러스 재단을 만났다. 2019년 3월 초, 겨울 문턱은 넘었지만 봄이라 하기엔 바람이 너무 쌀쌀해 코트 깃을 절로 여미게 되던 그날. 난 공덕동 중부 캠퍼스의 가파른 언덕길을 올랐다. 숨은 차서 씩씩거렸고 등 뒤로는 적당하게 땀도 흘렀다. 약속한 상담 시간에 늦지 않게 부지런히 걸어 올라가던 그 길이 한국에서 만나게 될 새로운 친구들과 새롭게 알게 될 교류와 소통의 즐거움을 가져다 줄 길이라는 것은 모른 채 말이다.  


상담 시간에 유난히 내 시선을 머무르게 했던 네 글자, ‘관계 탐구’. 상담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폭풍 웹 서핑을 돌렸다. 관계 탐구, 이경아 선생, 비폭력대화, NVC 등등. 그래 너로 정했다. 이 수업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로 마음이 조급해졌다. 1학기 강의가 3월 14일부터 시작인데 마감이 됐으면 어떻게 하지? 다행히 서울 50 플러스 포털 사이트에  수강신청, 수업료 입금까지, 첫 강의가 시작되기 바로 전날에서야 절차가 완료됐다. 본인 인증을 할 수 없어 아이핀 인증을 하러 여의도 나이스핀까지 가서 대면 인증을 해야 하는 등 포털 사이트 회원가입에서부터 한국계 외국인인 나에게는 어려운 점이 많았다.


중부 캠퍼스 4층 강의실에 초롱초롱 눈을 반짝이는 40대 후반에서부터 60대 초반에 이르는 수강생들이 모여들었다. 첫날 자기소개를 하면서 원래 이름이 아니라 불리기를 원하는 닉네임으로 소통해도 된다는 다소 나에겐 충격적인 일도 경험했다. 젊은 친구들은 본인들의 닉네임 하나쯤은 모두 갖고 있다는 듯, 기다렸다는 듯 닉네임을 말했고 그 닉네임을 정한 이유들을 설명했다. 그 설명 하나하나에도 사회의 관계와 익명성, 소통의 의미들이 모두 담겨있었다. 이렇게 근 20년 만에 돌아온 한국은 나에게 새로움 그 자체였고 충격이었다.    


인간관계와 의사소통을 위한 비폭력대화(Nonviolent Communication)


교재의 표지에 쓰인 문장을 살펴보니 인간의 소통이 그간 얼마나 폭력적이었는지 반증하는 듯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말로 상처 주고 말로 폭력을 행사하는 그런 사회에 살고 있었다. 그렇게 나의 관계 탐구 강의는 시작됐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내 마음의 문을 열어 내면을 들여다보게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날의 대화 파트너를 서로 관찰하고 느낌을 말하고 느낌에 근거한 욕구를 이끌어내는 일. 학교에서 배워본 적 없고, 그 어디에서도 가르쳐주지 않았던 내 느낌 알아채기. 상대방을 관찰해서 명료한 단어로 그 사람의 욕구를 이끌어 내기. 이 모든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강생들과의 대화와 훈련을 통해 차츰차츰 내 심리의 실체가 비로소 손으로 만져지듯 눈으로 볼 수 있듯 그렇게 구체화가 됐다. 나만이 아니었다. 관계에 좌절하고 소통 부재에 힘들어하는 수강생들은 스스로 위로받고, 위로했다. 누구랄 것도 없이 눈물 흘리고 눈물을 닦아주며 소통 부재의 암흑 같았던 터널의 벽을 짚어 서로를 이끌어 그렇게 긴 터널을 빠져나왔다.

https://youtu.be/PLcgQu4NMf4

관계탐구 강의를 했던 이경아 강사가 소개해줬던 노래다. 홍순관씨의 '나처럼 사는 건' 강의가 시작하기 전 마음을 가다듬고 진정시켜주던 음악이다. YouTube

“난 왜 관계에 목말랐을까?”


나는 잘 몰랐다. 내 느낌과 연결된 욕구를. 관계 탐구 강의가 끝나갈 때쯤 난 비로소 내가 오랜 세월 동안 욕구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느낌마저 억누르며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우리는 서로를 관찰하고 서로의 느낌을 알아채며 욕구와 부탁, 공감 과정을 때로는 대화로 때로는 상황극으로 그리고 때로는 댄스를 통해 소통했다. 함께 아파했고 함께 눈물 흘리며 공감했다.


12주는 결코 짧지 않은 기간이었다. 50대에 정서를 함께 공유하고 진정성을 나눌 수 있는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었다. 또한 관계에 혼란스러워하던 예전 내 모습처럼 약해질 대로 약해져 작은 건드림에도 감정의 줄이 끊어질 듯 흐느끼는 후배들을 만나 등을 두드려 줄 수 있었던 것도 내겐 소중한 경험이었다.

관계 탐구 강의를 듣고 큰 힘을 얻었다는 후배가 강의 마지막 날 정성스럽게 만들어온 꽃다발. 새롭게 시작하는 그 후배의 앞길에 힘이 돼주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5월 30일 12번째 강의를 끝으로 관계 탐구 5기 강의가 모두 끝났다. 마지막 강의 시간에 각자 음식 한 가지씩을 갖고 와서 고별 파티를 간단히 가졌다. 한 수강생이 팥떡을 맞춰서 갖고 오자 모두 '와~' 그날 공덕동 중부 캠퍼스 4층은 시루떡의 구수한 냄새로 가득했다.


세파에 부딪히고 현실과 조금은 타협하며, 우리는 각자 삶의 길에서 내 방식대로 인생을 살아내고 있었다. 군중 속에 무리 짓지 않고 홀로 웅크리고 있다 비로소 서로를 알아보고 친구가 됐다.  무리에 섞이지 않았던 다른 이유는 없으리라. 오롯이 내 삶의 방식으로 살아내고 싶어서일 테니.




이보다 더 훌륭한 관계 탐구가 있을까? 우린 모두 인생의 길을 탐구했고 아내, 엄마, 직장인 누구로서가 아닌 개인적 존재로서 나에게 집중해 인생의 새로운 길에 섰다. 이제 12주 강의가 모두 끝난 지금, 우리들은 각자의 가정에서 혹은 일터에서 남편과 자녀, 직장상사에게 2019년 3월부터 5월까지 공덕동에서 함께 했던 그 눈물겹고 뜨거웠던 경험들을 각자의 방법으로 구체적으로 모색해나갈 것이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함께 무리를 이루고, 서로 등을 토닥이며 먼 길을 떠난다.

이제 걸어온 길 중간 한 자락, 그늘 밑에 잠시 쉬며 우린 서로를 응원하고 남은 길을 마저 떠날 채비를 한다.

길에서 만난 벗들과 함께, 이제부터 걸어갈 이 길은 외롭지 않기를, 힘들지 않기를, 즐겁게 노래 부르며 춤사위 하늘거릴 수 있기를, 그렇게 편안하게 걸어가길 기대하며...


내 인생에서 2019년은 어떻게 기억될까?

이전 09화 불멸의 어머니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