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저의 엄마가 돌아가신 지 3년 되는 날입니다.
지난 2018년 2월 11일에 돌아가신 엄마를 기억하며 짧게 불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저희 엄마는 1926년생이십니다. 돌아가실 때 92세에 돌아가셨으니 모두들 '호상'이라며 저를 위로해주셨죠. 저도 아는 이들이 상을 당해 열리는 장례식에 참석할 때면 연로하신 부모님들이 비교적 건강하게 사시다가 돌아가시면 언제나 '호상'이란 말로 그들을 위로하곤 했었습니다.
근데 막상 제가 모친상을 당하고 나니 이 '호상'이란 단어가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호상'도 그저 '영원한 이별'이란 걸 엄마의 죽음 이후 서서히 알게 됐습니다.
모든 이별은 괴롭고 힘들죠. 죽음으로 인한 이별을 애도하는 기간을 가지며 떠난 이를 그리워해야 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저 역시 엄마가 돌아가신 후, 살아생전 바쁘다는 핑계로 제대로 돌봐드리지 못했다는 자책으로 괴로웠습니다.
어머니는 43세에 청상과부가 되셨죠. 큰딸이 만 22살이고 막내인 제가 만 4살일 때 줄줄이 5명의 딸과 아들 1명만 남겨놓고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당시 어머니가 느끼셨을 절망감과 아이들을 키우며 살아갈 앞날에 대한 두려움은 상상도 못 할 정도였을 겁니다.
그리고 8년의 시간이 흐른 후, 어머니에게 닥친 중풍이란 질환은 아주 오랫동안 어머니의 얼굴에서 웃음을 빼앗았습니다. 무기력하고 나약한 모습으로 하루하루 병마와 싸우셨던 어머니. 워낙 효녀였던 언니들의 간호 덕분에 병상에서 일어나 발걸음을 다시 내딛고 재활을 하시면서 힘겹게 일상생활을 영위해나가셨습니다.
어머니가 쓰러지신 게 제가 중학교 1학년 때였는데 저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저녁나절 왼쪽 팔과 다리의 마비로 절룩거리던 엄마를 모시고 동네 한 바퀴를 돌며 산책을 해드리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당시 저는 좀 부끄러웠습니다. 절뚝거리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며 누군가 학교 친구들이 보지 않을까? 주위를 유심히 살피며 부축하던 내 모습이라니... 그때 기억을 떠올리면 저 스스로에게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요즘도 길에서 풍을 맞아 힘들게 걷고 있는 어르신들을 볼 때면 물끄러미 그 어르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행여 다치지는 않을까 걱정하곤 합니다.
병약하고 기운이 없던 어머니가 다소 활기를 찾은 것은 생애 첫 해외여행을 다녀와서입니다. 방문하려는 국가의 초청장이 있어야 여권을 만들고 비행기를 탈 수 있었던 그 시절에 어머니는 독일에 거주하시는 작은 아버지 내외의 초청을 받아 약 두 달간 유럽 여행을 다녀오셨습니다. 독일의 병원에서 간호사로 계시던 작은 아버지와 작은 어머니 내외분이 일하시는 병원에서 치료도 할 겸 초청해주신 것이었죠.
저희 어머니는 곧잘 장난도 잘 치시고 유머도 넘치셨습니다. 손자 손녀들이 이런 할머니를 사진 찍어 인스타 등에 많이 올리기도 했지요. 두 달 간의 유럽 여행을 다녀오신 어머니는 처음 보는 유럽의 문화와 풍경에 완전히 넋을 빼앗긴 듯 사진 속에선 어김없이 환하게 웃고 계셨고 패션 센스 또한 힙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아마 한국보다는 해외가 체질적으로 훨씬 더 잘 어울렸던 모양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어머니의 외국 바람은 마침내 89년도 미국 이민으로 구체화됐고 미국으로 건너오신 이후에는 얼마나 활기차고 생기가 넘치셨는지... 아마도 한국의 남루하고 지리멸렬한 생활이 싫으셨던 것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손자 손녀들이 기억하는 엉뚱하고 즐겁고 천진난만한 할머니의 이미지는 미국 생활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미국 생활을 즐기시며 친목계원들끼리 여행도 가시고... 그렇게 사셨습니다. 2000년 이후부터는 한국에 있던 딸들과 손자 손녀들까지 모두 미국으로 건너가 대가족으로 사셨으니 아마 말년은 행복하지 않으셨을까 싶습니다.
저희 엄마가 90년대 중반 샌프란시스코 바닷가를 여행할 때 찍은 사진입니다. 미국에서는 환하게 웃으며 찍은 사진이 많습니다. 아마 미국 캘리포니아의 토양과 잘 맞으셨던 것 같습니다
오늘 이렇게 장황하게 저의 어머니 인생을 적어보고 있는 건, 돌아가신 어머니의 3주기를 어떻게 애도를 하면 좋을까? 고민 끝에 내린 결론입니다. 한국에 있는 제가 엄마 묘소를 방문할 수도, 미국에 있는 가족들이 애도하는 모임에 참석할 수도 없기 때문이죠. 저의 방식대로 돌아가신 엄마를 기리는 시간을 갖는 것. 저만의 애도라고 생각하며 글을 정리해봅니다.
엄마가 돌아가신 2018년 2월 이후, 제정신은 훨씬 피폐해졌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한숨을 쉬며 머릿속이 어지러워지는 것을 견뎌야 했습니다. 그러던 8월 어느 날 불현듯 엄마가 보고 싶어 혼자 묘소를 찾았습니다. 내려쬐는 8월 캘리포니아의 오후 햇살을 받으며 엄마의 묘소 옆에 돗자리를 깔아 놓고 엄마가 좋아해서 자주 들으시던 권혜경의 '산장의 여인'을 유튜브에서 찾아 틀어놓은 채 혼자 질질 짜며 넋두리를 해대던 나의 모습이라니...
아마 엄마는 너무 외로우셨을 겁니다. 젊은 청상과부, 줄줄이 달린 자식들, 외롭고 무섭고... 그걸 어떻게 견디셨는지, 그것도 병마와 싸우며... 이제 엄마가 그 모진 풍파를 겪으며 살았을 그 나이 때에 제가 와있습니다.
이제야 당시 엄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됐습니다.
'엄마 정말 외로웠겠구나... 무서웠겠구나...'
어머니의 죽음을 겪은 후, 인간의 죽음과 이별에 대해 한참을 고민하던 그 해 여름, 뜻하지 않게 작은 위로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저에게만 아니라 죽음으로 인한 모든 이별에 유용할 듯싶어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2018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이집트의 파라오 투탕카멘 왕의 유물 전시회가 열렸었습니다. 투탕카멘 왕의 무덤 발굴 100주년을 기념해 월드 투어를 열었던 것인데 이집트 피라미드를 가보는 것이 제 버킷리스트인 관계로 이 전시회를 관람했었죠. 유물전에 입장하기 전에 영상을 관람하는 것이 첫 순서였습니다. 이 영상을 볼 때 귓속에 확 꽂히는 문장이 있었죠.
어린 파라오, 투탕카멘 전시회에 전시됐던 유물. Photo by malee "고대 이집트인들은 사람은 두 번 죽는다고 믿었다. 첫 번째 죽음은 영혼이 육체를 떠날 때이고 두 번째 죽음은 그 사람의 이름을 말하는(즉 그 사람을 기억하는) 마지막 사람이 죽을 때 비로소 그 사람은 영원히 죽는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 우리는 비로소 소멸됩니다.
그 사람을 기억해주는 이가 있는 시간만큼은 비록 육체는 죽었다 하더라도 결코 죽은 게 아닙니다. 그래서 투탕카멘 왕은 불멸의 파라오가 된 것이겠죠. 몇천 년을 흘러도 파라오 투탕카멘의 이름과 이야기가 저잣거리를 떠돌아다니기 때문입니다.
저희 엄마가 손자 손녀들의 기억에 남아있고 그들이 모여 할머니를 기억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한, 저희 어머니 역시 불멸의 어머니입니다. 제가 돌아가신 아버지를 잊지 못해 생각하는 것처럼.
결코 그들의 삶은 사라지지 않고 가족이란 이름으로 제 생이 끝날 때까지, 그리고 손자 손녀 대를 이어 함께 묶여있게 될 것입니다.
이별을 맞이한 후에도 기억을 되새기며 세대를 건너 기억을 공유하는 것. 그 기억이 아스라이 사라져 갈 때 비로소 영원한 이별을 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므로 아버지와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기억에 묻어버리지 않기. 언젠가는 자연스레 영원한 이별을 하는 날이 돌아올 테니 말이죠.
어머니 사후 3주기를 맞아 스스로에게 다짐해봅니다. 더불어 너무 오래전에 돌아가셔서 몇 주기 인지도 모르는 저의 아버지까지 새록새록 그리워지는 밤입니다.
저희 어머니가 즐겨 들으시고 부르시던 권혜경의 1957년도 발표된 '산장의 여인'을 공유합니다.
https://youtu.be/N7myY7OTVB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