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마음은 누구보다 서로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마음속 깊이 새겨진 각자의 상처들을
어쩌지 못하고 끙끙거리며 상처를 후벼 파는 날카로운 말들을 쏟아냈다.
패밀리 카운슬링을 받으며 상처를 다 끄집어내 어떤 결말을 원했던 딸아이는 자신의 상처를 날 것 그대로 내게 드러내며 "엄마는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라며 나를 몰아 댔다.
함께 하는 상담에서 나는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 화살을 맞아야 했다.
나의 상처는 낫기는커녕 더 덧나고 깊어졌다. 게다가 뜻대로 운영이 되지 않는 회사 상황으로 인해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터라 마음은 지치고 상처 받고 늘 어수선하고 복잡하기만 했다.
마치 팽팽하게 당겨 극도로 긴장된 바이올린 현이 손가락을 튕기기라도 하면 날카롭게 공명하는 것처럼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듯 내 신경이 터질 듯 예민했다.
'어쩌면 도피, 어쩌면 탈출, 어쩌면 거리두기' 나는 비행기를 타며 한국행을 스스로 이렇게 규정했다.
그래도 시간이 약이라고 나를 둘러싼 스트레스 환경과 거리두기를 하자 현재는 숨 쉬면서 살 수 있을 만큼 좋아졌다. 가슴에 꽉 차 있던 답답함과 체증이 조금은 내려가 자주 나오던 한숨이 잦아들었다. 최근에는 잠실 석촌호수 인근으로 거주지를 옮겨 시간 날 때마다 호숫가를 걸으며 마음을 비워가고 있는 중이다.
'19년 만에 돌아온 연어'로서 그래도 타향보다는 고향이 살만한 곳이라며 이리저리 이곳 한국에서 똬리를 틀어보는 중이다.
물론 쉽지는 않다. 고향으로의 완전한 귀향을 꿈꾸고 있지만 녹록지 않은 현실에 부딪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나는 나에게 최면을 걸고 있다.
"그래! 인생에서 3년쯤 온전히 나를 위해 쉬었다 가자!"
한국으로 돌아와 잠깐 저소득층 아동들을 방과 후에 돌보는 비영리단체에서 자원봉사를 했었다. 전국의 방과 후 돌봄 센터에서 아동들을 돌보는 교사나 돌봄을 받고 있는 아동들의 진솔한 체험을 담은 편지들을 읽고 있는데 문득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 편지를 읽는 순간, '난 그동안 딸아이를 기른 것이 아니라 방치했었구나' 그 편지 속의 아이들이 학교를 끝내고 아무도 없는 집에서 홀로 생활하며 엄마 혹은 아버지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시간까지 고군분투하는 모습들을 적어 내려간 편지를 읽으며 그 편지 속 주인공이 내 딸아이의 상황과 치환해도 하나도 어색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늦은 밤 퇴근하고 들어올 때면 '나를 향해 분노로 이글거리던 딸아이의 눈빛'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이혼한 싱글맘으로 가정 경제를 책임져야 한다는 핑계, 회사를 창업하면서 자리 잡아야 한다는 핑계, 스트레스받으니 나도 좀 풀어야겠다는 핑계... 엄마가 온갖 핑계를 대며 바깥으로 떠돌 때 딸아이는 홀로 학교에 내던져진 것처럼 노란 머리 파란 눈의 아이들의 생경한 문화에 보호막 하나 없이 날 것으로 부딪히며 미국에 적응해야 했던 것이다. 플러스, 한국어와 문화를 잊으면 안 된다는 나와 우리 집 식구들의 툭툭 던지는 한 마디까지 '주류문화에 적응하랴, 모국문화도 지켜야 한다'는 이중의 무게에 짓눌려왔다고 고백했다.
딸아이가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오로지 혼자 카오스를 겪고 있다는 사실을 그때의 난 알지 못했다.
달랑 둘 밖에 없었던 우리 가족은 그렇게 가족이 아니라 소 닭 보듯 원수가 됐다. 딸아이는 나에게 높은 담을 쌓고 행여 엄마가 자신에게 관심이라도 가지면 삭 바람 불 듯 단칼에 잘라 버리고 관계 맺기를 거부하며 더욱 높게 담을 쌓아 올렸다. 나 역시 아이가 혼돈을 겪고 있는 것도 모른 채 '내가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하는데...' 이런 서러움이 딸아이의 냉대와 결합돼 나의 가슴 밑바닥에 상처로 꽁꽁 얼어붙어 버렸다.
가족이란 무엇일까? 왜 같이 살아야 할까? 서로 상처만 주는 관계라면 그래 따로 살자. 가족이란 무엇인가 자문자답을 하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솔직히 그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거리를 두고 미국과 한국에서 떨어져 산 지 이제 2년. 그동안 아이는 많이 성숙했고 나 또한 조금은 성숙해진 듯하다. 무엇보다 나 스스로 좋은 부모란 무엇인가? 고민 한번 없이 하루하루 살아내기 급급했던 아주 무책임한 엄마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앞으로 나의 삶에서 딸아이를 우선순위에 놓고 관심과 사랑을 나누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그것만이 부모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힘들어하는 딸을 위로하고 힐링해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테니 말이다.
지난 12월 초 미국에 있는 딸아이가 입국해 14일의 자가격리를 마치고 두 달 동안 함께 생활하다 얼마 전 출국했다. 브런치에 약 두 달 넘게 글을 올릴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완전 생활인 모드로 돌아가 하루 종일 엄마로 스탠바이 하며 딸아이의 하명(?)을 기다렸다. 그렇게 두 달간 싸우기도 울기도 또한 웃기도 한 시간들이 지나갔다.
딸애가 공항 게이트를 들어간 후, 보딩까지 기다리는 시간 동안 폭풍 카톡을 보내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딸아이가 보낸 카톡 문구에 눈물이 쏟아진다. "엄마, 힘들어도 같이 걸어가자!"
다음날 석촌호수를 천천히 산책했다. 내게 가족이란 무엇일까? 다시 물어본다. 석촌호수 동쪽에서 걷기 시작해 서쪽까지 한 바퀴를 다 돌고 두 번째 돌기 시작할 때쯤 이런 답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딸아이와 석촌호수를 함께 걸으며 거위 가족이 뒤뚱거리며 얼음 위를 걷는 것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Photo by malee
'나의 일상과 너의 일상을 공유하는 것' 그것이 가족이구나. 그리고 내가 지난 27년간 딸아이와 공유했던 우리의 일상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서로가 쌓아놓았던 담을 넘어 딸아이와 나눌 일상의 공유. 이제부터 새롭게 시작해보려고 한다. 이렇게 일상생활을 공유하고 기억을 남기며 진정한 의미의 가족이 되는 것. 이걸 난 왜 몰랐을까?
다행스럽게 두 달간 엄마와의 생활에서 그나마 작은 위로를 받고 미국으로 돌아간 딸아이가 자주 자신의 일상을 내게 보내온다. 이제야 딸아이와 관계를 새롭게 쌓아나갈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은 듯해서 나 자신도 매우 안도하고 있다. 아무쪼록 못난 부모로 인해 얻은 상처들이 진정되고 그 상처를 뚫고 '진정한 가족'이라는 새순이 돋아나길 간절히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