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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lee Aug 03. 2020

병산서원, 한 폭 그림에 취하다

힐링 글쓰기

한국의 서원을 보고 싶다는 생각에 불현듯 떠난 여행길. 가장 보고 싶었던 곳은 단연코 병산서원이었다.

안동 하회마을을 돌아보고 난 후, 병산서원을 향해 차를 운전했다. 지도에서 보면 낙동강의 물줄기가 S자로 흐르는데 S자가 만든 골짜기 안에 하회마을과 병산 서원이 나란히 있어 하회마을을 투어하고 병산서원을 방문하면 꽉 찬 1일 코스로 손색이 없다.  


하회마을에서 6km 떨어진 거리에 있으니 멀다고는 할 수 없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면 불편하기 그지없다. 하회마을에서 이곳 병산서원으로 곧장 갈 수 있는 대중교통 수단이 없다 보니 중간에서 내려 한참을 걷든지 아니면 다시 안동까지 가서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한다. 안동의 관광 구역을 묶어 투어 버스를 운행해보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차를 운전하면서 온갖 아이디어로 안동 지역의 관광을 증진하는 말의 향연을 나누고 있을 때였다. 족히 신장이 190cm는 될 듯한 체격 좋은 외국인이 땀을 뻘뻘 흘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무거운 배낭 차림으로 포장도 안된 도로를 걷고 있는 외국인 옆을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다.  


‘가만, 저 친구 병산서원 가는 거 아닐까?’ 우리 일행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하게 됐다. ‘차 좀 세워봐’ 길 한편에 차를 세우고 그 친구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Are you going to Byung San? 맞았다. 안동 하회마을에서부터 걸어오는 길이란다. 아직 4km도 넘게 남은 길이었다. 이 친구를 앞 좌석에 태우고 병산서원을 향해 다시 출발했다. 연세대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독일 청년이었다. 일 년 전에 한국에 와서 한국 곳곳을 시간 날 때마다 혼자서 돌아다닌다고 한다.


한국어도 거의 하지 못하는 독일 청년이 안동까지 혼자 여행 와서 걸어 다니는 것을 보니 마음이 짠하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지만… 습하고 무더운 여름 날씨에 이게 웬 고생인가 싶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오다 보니 병산서원 주차장에 도착했다. 돌아가는 차편도 해줄 테니 편하게 서원을 관람하고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독일 청년과 헤어졌다.


이제부터 병산서원을 차근차근 훑어볼 시간이다. 우리 중장년층 세대들의 병산서원에 대한 로망은 아마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3]에서부터 시작됐을 듯싶다.  “인문적·역사적 의의 말고 미술사적으로 말한다 해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원건축으로 한국 건축사의 백미”라며 병산 서원의 아름다움을 찬양한 유홍준 교수는 “하회의 답사적 가치는 어떤 면에서는 하회마을보다 꽃뫼 뒤편 병산 서원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며 한국 중장년층 가슴에 불을 지펴 놓았다.

 

입교당은 휘어진 기둥, 커다란 통나무를 깎아 만든 계단까지 자연이 그대로 들어와 있는 건축물이다. Photo by malee


병산서원에 들어서자마자 모든 이들이 만대루에 감탄한다. 다른 서원에서는 볼 수 없는 족히 200명은 함께 모여 강학을 할 수 있을 만큼 큰 망루인 만대루. 휘어진 모습 그대로 아래층에 서있는 기둥들과 자연 그대로의 주춧돌, 커다란 통나무를 깎아 만든 계단까지 자연 그대로가 건축물에 그대로 구비구비 살아있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낙동강 모래사장의 풍경이며 낙동강 물줄기를 감싸 안은 산세들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옛 서생들이 품었던 자연의 기개가 느껴진다. 자연의 섭리를 깨우치며 공부할 수 있도록 대자연을 건축으로 끌어들인 대표적인 한국 건축의 백미라는 유홍준 교수의 찬양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입교당에서 바라본 만대루와 병산서원 입구. 만대루 기둥 사이사이로 보이는 낙동강 물줄기까지 자연이 서원으로 들어와 있는 모습이다. Photo by malee


만대루 밑을 통해 마당으로 들어서면 좌우로 동재와 서재가 있고 맞은편으로는 입교당이 서있다. 입교당에 앉아 만대루가 들어선 서원의 앞쪽을 바라보면 앞으로는 산을 끼고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만대루 기둥 사이사이로 자연이 마치 그림 화폭 한 첩인 듯 수려한 자연으로 잠시 말을 잃을 정도다.


병산서원 곳곳에는 배롱나무가 심어져 있다. 배롱나무는 예부터 선비들이나 유학자들이 서원 혹은 향교에 심었고 사찰에서도 많이 심었던 꽃나무다.  일 년에 한 번씩 나무껍질이 벗겨지는 배롱나무처럼 정진을 거듭해 심신을 수련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여름철 흐드러지게 핀 배롱나무 만발한 병산서원의 모습은 정진은커녕 황홀하기 그지없어 수련에 더 지장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다.


위의 사진 광영지, 아래 사진 장판각. 서원에는 어김없이 연못이 등장한다. 연못 주변의 배롱나무가 활짝 폈다. 장판각에는 각종 고문서 등이 보관돼있다. Photo by malee


배롱나무 자태에 취하고 만대루의 풍경에 취해 병산서원에 해가 떨어질 즈음에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독일 청년이 의자에 앉아 있다 유별나게 반겨준다. 아마 우리가 떠났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한 듯하다. 오늘 밤 숙소를 물어보니 다시 서울로 올라가야 한다며 안동 시내버스 터미널에 내려줄 수 있는지 물어본다.


"Of Course !!"  병산서원의 황홀한 자태에 취한 저녁… 이렇게 우리는 안동 시내버스 터미널에 눈동자 파란 외국인을 떨구고… 지금 이 순간을 저 친구도 평생 기억했으면 좋겠다는 부질없는 생각을 해봤다.


병산서원

병산서원은 고려 중기부터 안동 풍산에 있던 교육기관인 풍악 서당(風岳書堂)을 모체로 건립됐다. 지방 유림의 자제들이 모여 공부하던 곳으로, 고려 말 공민왕 때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 왕의 행차가 풍산을 지날 무렵, 풍악 서당의 유생들이 난리 중에서도 학문에 열중하는 것을 보고 왕이 크게 감동하여 많은 서책과 사패지(賜牌地)를 주어 유생들을 더욱 학문에 열중하도록 격려하였다.

200년이 지나면서 서당 가까이에 가호가 많이 들어서고 길이 생기며, 차츰 시끄러워지면서 유림들이 모여 서당을 옮길 곳을 물색하던 중에 서애 류성룡 선생께서 부친상을 당하시고 하회에 와 계실 때 그 일을 선생에게 문의하니, 서애 선생께서 병산이 가장 적당할 것이라고 권하게 되었고 유림들은 선생의 뜻에 따라 1575년(선조 8) 서당을 병산으로 옮기고 ‘병산서원’이라고 고쳐 부르게 됐다.

1614년(광해 6)에 우복 정경세, 창석 이준, 동리 김윤안, 정봉 안담수 등 문인들이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존덕사를 창건하여 선생의 위판을 봉안하였다. 1662년(현종 3)에 선생의 셋째 아들인 수암 류진(柳袗, 1582-1635) 공의 위패를 종향하였다.

병산서원은 1863년(철종 14)에 조정으로부터 '병산서원'으로 사액을 받았으며 1868(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이 내렸을 때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중 하나다. 1978년 3월 31일에 사적 제26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서애 류성룡 선생의 문집을 비롯하여 각종 문헌 1,000여 종 3,000여 책이 소장돼 있다.

-병산서원 공식 홈페이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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