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기대 없이 찾아간 곳이었다. 이리저리 여행 코스를 검색해보아도 딱히 눈길을 끌만한 곳을 발견하지 못했다. 남계서원을 방문하고 함양에서 몇 군데 돌아볼 곳을 리스트 업 했다. 여행자 추천 사이트에서 가장 많이 추천해준 개평마을로 운전 경로를 입력했다.
좌안동 우함양, 고즈넉한 개평마을, 하회 버금가는 기품 흘러
한옥마을은 어디에 있는 곳을 방문해도 좋다. 최근에 지어져 콩기름 반짝이는 한옥만 아니라면 말이다. ‘좌안동 우함양’이라고 하더니만 옛말 그르지 않게 개평마을은 고즈넉하고 기품 있는 모습으로 여행객을 반겨줬다.
아니 안동 하회마을의 시끌벅적지근한 투어리스트들의 소음이 불편하다면 우클릭 하여 함양의 개평마을을 거닐어 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안동 하회마을 버금간다.
개평마을에는 조선 성종 시대 대학자인 일두 정여창 고택이 자리 잡고 있다. 박경리 선생의 대하소설 ’ 토지’ 드라마가 촬영된 곳이다. 3천여 평의 너른 대지에 12동의 건물이 배치된 남도 지방의 대표적 고택으로 민속문화재 186호로 지정돼 있다.
흔히 안동이나 경주를 방문할 때 느껴지는 관광지의 익숙함이 싫어질 때가 있다. 자연스러운 모습에서 역사의 숨결을 느끼고 수백 년 전의 삶들을 유추해보고 싶은데 관광지에서는 그런 생각이 정지된다. 그저 관광객 물결에 휩쓸려 돌아다니다 보면 어느새 그곳을 떠나야 할 시간이 되는 그런 순간들이 언제부턴지 싫어졌다.
함양은 나에게 느리게 말을 거는 듯싶었다. 마치 시간이 아주 천천히 흐르는 듯 말이다. 개평마을 일두 정여창 고택 대청 마루칸에 걸터앉아 나지막한 높이의 담을 한참 바라보았다. 골목 어귀 길들을 구비구비 다니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오랜 세월의 흔적을 이리저리 살펴보기도 했다. 만족스러웠다. 안동 하회마을 버금가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향유하기에 하회마을보다 훨씬 더 풍성한 품으로 나를 안아줬다.
한계령 못지않은 구비구비 오도재 길, 모래 섞인 포장도로 불빛 받아 밤에도 반짝반짝
개평마을을 떠나 오도재를 넘어보기로 했다. 오도재는 이 지역에서 지리산으로 가기 위해 꼭 넘어야 했던 고개다. 말이 고개지 정상에 있는 지리산 제일문이 위치한 높이가 750미터가 넘는다고 하니 작은 산이다.
이 산을 넘어 지리산에 갈 수 있도록 길을 닦으면서 180도 구비구비진 오도재 길이 만들어졌다. 오도재 길로 인해 경남 내륙에서 보다 안전하게 지리산을 갈 수 있게 되면서 이 길을 통과하는 관광객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원래 이곳 토양은 모래가 많이 섞인 땅이라 지반이 매우 약했기 때문에 급경사로 길을 낼 경우 지반이 무너져 내릴 수 있어 이처럼 경사를 최대한 완만하게 만들게 됐다고. 이곳 함양의 원래 토양인 모래와 흙이 섞인 마사토(자잘한 모래와 흙이 섞인 토양을 일컫는 일본식 조어)를 섞어 도로를 포장하면서 밤이면 불빛에 반짝이는 모래알들이 더욱 환하게 길을 밝히고 있다.
이 장관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전국에서 사진작가들이 몰려들어 오도재의 낮과 밤을 렌즈에 담았다. 이렇게 오도재 길은 2006년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됐다.
신라시대 비운의 천재, 최치원이 조성한 상림공원은 함양의 산소 탱크
함양에는 상림공원이 군 중심부에 큰 숲을 이루고 있다. 이 상림공원은 신라시대 최치원이 천령군(현 함양) 태수로 있을 때 인공적으로 조성한 숲이라고 한다. 비만 오면 마을이 잠기고 논밭이 유실되는 것이 안타까워 함양을 흐르는 강에 둑을 쌓아 상림과 하림을 만들었다는데 현재 하림은 유실됐고 상림만 남아 함양을 대표하는 공원으로 사랑받고 있다.
이곳 상림공원에는 뿌리가 다른 두 나무의 몸통이 합해져서 하나가 된 연리목이 있다. 부부간의 금슬이나 남녀 간의 깊고 애절한 사랑을 일컬을 때 연리목 혹은 연리지(뿌리가 다른 두 나무의 가지가 합해진 것)로 부른다.
상림공원 안에 있는 이 연리목은 수종이 다른 나무의 몸통이 결합된 것으로 느티나무와 개서어나무 몸통이 결합돼 더욱 상서로운 나무로 여겨진다. 이 나무 앞에서 손을 잡고 기도하면 부부간의 애정이 돈독해지고 남녀 간의 사랑도 이뤄진다니 갈등과 불화에 시달리는 남녀라면 함양으로 가 볼일이다.
워낙 상서롭고 귀한 나무로 여겨졌던 연리목에 대한 기록은 역사서에도 등장한다. 삼국사기에 연리목에 대한 기록이 총 4번이 나온다는데 ◆신라 내물왕 7년 시조묘 ◆고구려 양원왕 2년 배나무가 연리지가 된 기록 ◆고려 광종 24년 ◆성종 6년에도 연리지가 나왔다고 기록에 남길 만큼 귀히 여겼다.
암반마다 새겨진 석공들의 30년 불사, 서암정사 보는 순간 이국 정취에 매료
장마 끝자락 비가 쏟아져 내리는 와중에 찾아간 서암정사는 맨 처음 함양 가볼만한 곳을 검색했을 때부터 내 눈길을 사로잡았던 곳이다. 장대비 쏟아지고 낮은 안개가 계곡을 구비구비 감싸며 올라간다. 이 집중 호우에 사찰을 찾는 이가 누가 있으랴?
차에서 내려 쏟아지는 비를 피하며 요리조리 산길을 올랐다. 마침내 서암정사 입구가 눈 앞에 나타났다. 벌어진 입이 닫히지 않았다. 여기가 어디메고? 한국인가? 아니면 천상계 어디인가? 한국의 사찰 중에 이런 곳이 있다고?
자연 암반에 새겨진 사천왕상을 옆으로 하고 위로 쭉 뻗은 돌계단을 밟아 오른다. 돌계단을 하나하나 오를 때마다 마치 천상계로 올라가는 입구를 걷는 듯하다.
서암정사는 조계종 해인사의 부속 사찰로 인접해있는 벽송사의 암자였다. 창건주인 원응 스님은 벽송사에서 참선을 하던 중 서암정사의 자연 석굴을 발견했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 그 어느 지역보다 빨치산과 국군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라 벽송사는 당시 빨치산들의 야전병원이었다고.
폐허가 된 사찰을 보듬고 재건하면서 인근 서암정사의 자연 석굴을 발견하고 이곳에 석불 불사를 일으켜 전쟁으로 죽은 원혼들을 위로하기 위해 서암정사의 석불역사가 시작됐다고 한다.
1988년 암자까지 차량이 통행할 수 있는 도로가 개설되자 그 이듬해부터 석굴 불사를 시작 하여 서암정사를 천년만년 도를 닦는 만년 도량으로 만든다는 계획 아래 석공 6명이 30년 동안 조각한 석굴과 문수보살, 보현보살 등 곳곳에 자연 암반에 새겨져 있다.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장엄하고 이국적인 사찰. 한여름 쏟아지는 장맛비 헤치고 올랐던 그날 오후, 꿈같은 여행이었다. 쏟아지는 장대비로 제대로 사진을 촬영할 수 없었던 것이 한이 돼, 오는 가을 다시 한번 서암정사로 가볼 참이다. 서암정사의 가을 모습은 어떨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