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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lee Jul 14. 2020

안동 도산서원과 이육사문학관

힐링 글쓰기 / 선조와 후예

안동 도산서원을 방문한 날은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안동 시내에서 35번 국도에 올라 도산서원 이정표를 따라 달린다. 도로 오른쪽으로 낙동강 줄기를 이루는 안동호를 끼고 돌다 보면 마치 물 위를 달리는 듯한 착각이 든다. 아침부터 비가 내려서일까? 안동호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를 가르며 마치 신선 물놀이하듯 안개 낀 안동호를 따라 도산서원으로 스르륵 미끄러져 들어갔다.

안동 시내에서 도산서원으로 향하는 35번 국도. 안동호가 도로 옆에 구비구비 흐르고 비 온 날 물안개가 차를 감싼다. Photo by malee


비가 오는 날은 문화재를 방문하기 좋은 날이다. 평소 왁자지껄한 소음 없이 호젓하게 거닐며 옛 역사를 떠올리고 음미하며 앞으로의 내 발걸음을 다잡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도산서원 주차장에 도착하니 관광버스 한 대 없다. 오늘 도산서원 방문은 무척 만족스러울 듯하다. 주차장에서 도산서원으로 들어가는 길도 오가는 이 없이 고즈넉하게 우리를 맞았다. 지금에야 이렇게 길이 넓었지 예전 서당을 다니며 퇴계 이황 선생에게 수학을 하던 서생들은 좁다란 오솔길을 걸으며 학문에 정진했을 것을 생각하니 참 편한 세상에 산다는 미안함이 든다.

 

도산서원으로 들어가는 입구 오른쪽 강 건너에 작은 정자가 보인다. 안동호로 흐르는 물길  가운데에 높이가 있는 둔덕 위에 있는 작은 정자다. 섬이라 하기에는 작지만 달리 뭐라 부르기도 애매하다. 이 섬 가운데에 정자가 있다. 도산서원 입구 쪽에서 이 정자가 잘 보이는 곳에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다. 시사단(試士壇)이라 불리는 이 정자는 1792년 3월에 정조대왕이 영남의 사림을 위해 도산서원에서 과거를 치렀던 것을 기념하여 단을 쌓고 전각을 세운 것이라고 한다.

시사단이 안동댐 공사로 물에 잠기게 되자 축대를 쌓아 작은 섬을 만들어 보존하고 있다. 이곳을 가기 위해서는 서원 쪽에서 나룻배를 타고 건너야 한다. Photo by malee


당시 과거에 응시한 이들이 너무 많아 장소를 도산서원으로 하지 못하고 도산서원 아래 낙동강 모래강변에서 시험을 치렀다고 하는데 답안지를 제출한 사람만 3,632명에 이르는 대규모 시험이었다고 하니 오늘날 공무원 시험에 너도나도 몰빵인 노량진 공시생들의 모습과 오버랩된다.  


1976년 안동댐 공사로 시사단이 물에 잠기게 되자 10m 높이로 둥근 축대를 쌓아 옮긴 것이라고 하는데 이곳으로 가려면 서원 앞 강가로 내려가 나룻배로 건너야 한다. 마을 주민들이 순번을 정해 나룻배를 운행한다는데 비 오는 평일이다 보니 나룻배만 매어있고 사공은 보이지 않는다. 그냥 서원만 보고 가야 할 듯하다.

소수서원이 평지에 세워졌다면 이곳 도산서원은 산자락에 위치해있어 아래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며 차례로 건물들이 놓여 있다. 문을 들어서서 동쪽은 퇴계 이황 선생이 직접 건축해 학생들을 공부시키던 도산서당 구역이다. 서당 옆 싸리문이 아직도 보존돼있다. 퇴계 이황 선생은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매일 이 싸리문을 밀치고 마루에 올랐을 것이다. 이 싸리문은 유정문으로 불리는데 그 뜻은 ‘그윽한 곳에서 수도하는 사람은 바르고 길할 것’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한국의 서원이 세계문화유산에 선정된 이후, 부쩍 서원을 찾는 관광객들이 많다고 한다. 이 때문일까? 서원의 핵심 공간이라 할 강학당인 전교당이 현재 보수 중이라 진입이 금지돼있다. 전교당 현판으로 선조의 명령으로 임금 앞에서 한석봉이 직접 썼다는 도산서원 명패가 걸려있다는데 사진으로만 볼 수 있을 뿐이다.


도산서원을 느긋하게 살펴보고 나왔지만 사실 오늘 방문의 주요 목적지는 인근에 위치한 이육사 문학관이다. 도산서원 주차장으로 나오면 퇴계 종택과 이육사 문학관 가는 길 이정표가 나온다.

이육사는 본명이 이원록으로 퇴계 이황의 14대 후손이다. 아래는 두산백과가 이육사를 설명해놓은 글이다.


육사(陸史). 본명 원록(源祿). 조부에게서 한학을 배우고 대구 교남(嶠南) 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1925년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1926년 베이징으로 가서 베이징 사관학교에 입학, 1927년 귀국했으나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돼 대구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때의 수인번호가 264. 이를 따서 호를 ‘육사’라고 지었다. 출옥 후 다시 베이징대학 사회학과에 입학, 수학 중 루쉰 등과 사귀면서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1933년 귀국, 육사란 이름으로 시 《황혼(黃昏)》을 《신조선(新朝鮮)》에 발표하여 시단에 데뷔, 신문사·잡지사를 전전하면서 시작 외에 논문·시나리오까지 썼다. 또한 루쉰의 소설《고향(故鄕)》을 번역하였다. 1937년 윤곤강 ·김광균 등과 함께 동인지 《자오선(子午線)》을 발간, 그 무렵 유명한 시《청포도》를 비롯하여 《교목(喬木)》 《절정(絶頂)》 《광야(曠野)》 등을 발표했다. 1943년 중국으로 갔다가 귀국, 이 해 6월에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 이듬해인 1944년 베이징 감옥에서 옥사했다.

이육사가 죽은 후, 1년 뒤에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되었다. 그 후, 1946년 신석초를 비롯한 문학인들에 의해 유고시집 《육사 시집(陸史詩集)》이 간행되었고, 1968년 고향인 경상북도 안동에 육사 시비(陸史詩碑)가 세워졌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두산백과]


이육사가 한국 유학의 대표자인 이황 선생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학교에서 배웠던가? 아니 이육사의 독립운동 여정을 자세하게 배운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오로지 떠오르는 것은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계절... ' 서정적인 청포도 시 구절뿐이다.


도산서원 주차장에서 휘몰아치는 빗줄기에 잠시 고민을 하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이육사 문학관을 향해 차를 몰았다. 비 몰아치는 경북 안동의 산속에 위치한 이육사 문학관. 산속에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2층 건물이었다. 비를 헤치고 방문해 잠깐 돌아보려고 했던 계획은 저녁 어둑해져 문을 닫을 때까지 이곳을 이리저리 헤집고 다니며 오후 내내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우리 일행은 격렬했지만 여리고 순수했던 이육사의 삶의 흔적을 느끼고 그가 남긴 작품들을 돌아보며 마치 질풍노도의 시대를 보냈던 20대 초반으로 돌아간 듯, 흥분하고 목매여하며 그렇게 하나하나 이육사의 삶을 경험해갔다.  

 

이육사 선생의 유일한 혈육인 이옥비 할머니(80세)가 기억하는 아버지 이육사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

헤어졌을 때 만 세 살에 불과했으니 기억 속에 없는 것이 당연할 텐데 어떤 한 순간이 강렬하게 뇌리에 박혀 아버지를 기억한단다. 1943년 아버지가 구속돼 베이징으로 압송되던 날.


포승줄에 두 손이 묶이고 용수(죄수의 얼굴을 볼 수 없게 싸리나무로 만든 둥근 통)를 뒤집어써서 얼굴을 푹 가린 아버지가 건넨 마지막 말
"아버지 다녀오마"


올초 방영된 MBC 예능 프로그램인 [선을 넘는 녀석들-리턴즈]에서 안동 이육사문학관을 찾아 이옥비 할머니를 인터뷰한 영상이 있다. 유튜브에도 이 영상이 남아 있어 가끔 들어가서 아직도 보고 있다. 문학관에서 이육사 선생의 유품들을 돌아보자니 만 세 살짜리 유일한 혈육인 딸아이를 용수 속에서 바라보며 가슴이 찢어졌을 이육사 선생의 아픔이 내게도 전해진다.

대구형무소 수감 당시 수인번호 264에서 따온 호가 육사다. 원록이 본명. Photo by malee


문학관은 이육사 선생의 작품들을 연대기 별로 정리하고 전시해놓았지만 작품 활동 보다도 더 열렬하게 정진했던 독립운동에 대한 기술도 정리가 잘 돼있다. 특히 이육사 선생이 고문당한 처참했던 고문 현장과 피로 얼룩진 도포, 감옥 수감 도구들도 전시되고 있어 악랄하고 광폭했던 일본 경찰의 만행을 느낄 수 있다.

이육사 선생이 일제에 의해 옥고를 치르던 모습을 시청각 자료로 만들어놓았다. Photo by malee


치열하게 민족의 독립을 위해 무장 투쟁도 마다하지 않았던 이육사의 작품들은 시와 평론, 시나리오까지 다채롭게 정리돼있다. 마지막까지도 변절하지 않은 채 죽음으로 자신의 신념을 지켰던 이육사. 그를 청포도의 시인으로만 기억해왔던 이가 있다면 지금 당장 안동으로 달려가 그의 문학관을 방문해봐야 한다.


이육사 문학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다양한 유품과 작품들, 격렬했던 저항을 재현한 감옥과 연대기로 서술한 각종 독립운동의 역사들이 우리들 가슴을 먹먹하다 못해 꽉 차오름에 잠시 목이 매게 되는 뜨거운 경험을 하게 될 터이니...

청포도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이육사





광야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이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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