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들산들 부는 자연의 바람을 마시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뿐이다. 사람들 북적거리는 서울을 벗어나 쪽빛 하늘 쪽빛 바다 청정 지역에서 말이다. 간절히 원하면 길이 보인다 했던가? 지인에게서 지난 수요일 전화가 왔다.
“이번 주 주문진 아파트 비었는데 놀러 가실래요?”
어이쿠 이게 웬 떡? 이렇게 해서 예정에 없던 주문진행 주말 나들이가 이뤄졌다.
주문진에 위치한 이 아파트는 지인이 운영하는 회사에서 직원 복지를 위해 구입하여 펜션으로 이용하고 있는 곳이다. 몇 번 주말에 가겠다고 요청했는데 늘 대여 스케줄이 꽉 차있어서 부탁을 들어주지 못했던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었나 보다.
철 이른 주문진 소돌해변. 청아한 너무나 청아한 코발트 블루 바닷 색깔로 오랜만에 눈호강을 했다. Photo by malee
6월 초 주말 스케줄이 빈 것을 확인하고는 얼른 내게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놀기 좋아하는 사람에겐 이런 지인 찬스가 아주 쏠쏠하다. 이렇게 해서 2박 3일 주문진 여행이 시작됐다. 사실 동해 바다를 안 가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50대 중반을 넘겼으니 가봐도 수 십 번은 가봤을 동해 바다지만 그래도 일상을 떠나 바다를 보러 간다는 것 자체는 늘 설렘과 기대를 주는 아주 작은 행복 중 하나다. 특히 요즘과 같은 코로나 정국에서는 말이다.
나이 들면서 여행을 떠나니 여행지에서의 즐거움이 예전과 좀 달라진다. 광폭 행보로 이곳저곳 사진 찍기 바쁘게 움직이는 여행보다 묵을 곳 정해 놓고 동네 마실 다니듯 기웃거리며 보고 먹고 마시는 소소한 즐거움이 새롭다.
금요일 오후 동서울 터미널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떠났다. 주문진 터미널에 내리자마자 장치찜을 먹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주문진 수산시장 쪽으로 재빠르게 걸어갔다. 수요 미식회에 소개됐었다는 장치찜을 먹겠다며 점심부터 굶고 왔다는 후배와 나는 부지런히 걸어 마지막 손님을 받고 한숨 돌리고 있던 월성 식당에 무사히 터치 다운.
월성 식당의 장치찜. Photo by malee
닫으려는 문을 서울에서 지금 막 내려왔다는 비장의 무기를 꺼내며 읍소…
결국 주방을 보시는 남자 사장님에게 다시 앞치마를 두르게 하고 마침내 한 접시 수북한 장치찜을 맛보게 됐다. 어라 근데 이 장치라는 놈, 아구도 아닌 것이 장어도 아닌 것이 이상한 형태의 생선이었다.
살은 말랑말랑하고 적당한 기름기에 매콤한 양념이 어우러져 아귀찜보다 기름지고 장어와는 달리 매콤해서 아주 밥도둑이 따로 없다. 여기에 곰배령 생옥수수 막걸리까지 소박한 호사를 부리고 숙소를 찾아 나섰다.
밤늦게 아파트에 도착해 이런저런 이야기 꽃을 피우다 잠이 들었다. 주위의 깊은 어둠 때문일까? 불면증 때문에 고생이라는 후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코를 골며 잠을 자기 시작했다. 도시에 살아서 불면증일까? 늦은 저녁 포식해서 잠이 쏟아진 걸까? 어찌 됐든 오랜만에 자는 꿀잠이 도시에서도 계속되길 바랄 뿐이다.
아파트가 위치한 주문진 소돌 마을. 이른 아침부터 아파트 근처 곳곳에서 닭을 키우는지 여기저기서 닭이 우렁차게 울어댄다. 푹 자고 일어나 상쾌한 몸으로 동네 한 바퀴 염탐해봤다. 멀지 않은 도로변에 깨끗하게 생긴 막국수 집이 눈에 띈다. 오픈 시간을 확인하니 아침 8시부터 문을 연단다. 흠… 아침부터 막국수 먹는 사람이 많나? 부지런히 숙소로 돌아와 나갈 채비를 하고 막국수 집으로 향했다.
이른 아침인데 벌써 막국수 먹으러 온 외지인들이 하나 둘 눈에 띈다. 실내를 둘러보니 심상치가 않다. 어젯밤 주문진 수산시장 인근 월성 식당에서 먹었던 장치찜도 수요 미식회에 나왔다는 정보를 갖고 찾아갔었는데 아침부터 막국수 먹겠다는 가상한 용기를 예뻐하셨는지 이 집 막국수 맛 또한 환상이다. 맛있다며 엄지손가락을 추켜 세워드렸다. 심드렁한 주인아저씨 왈… “우리 집 맛집이여. 모르는 가벼?”
주문진 소돌마을에 위치한 주문진 막국수 집의 막국수. 맛이 담백하다.
이번 여행은 주문진에서만 머물기로 했다. 일단 차가 없기 때문에 장거리 이동이 불편하기도 했고 몇 번씩 가본 곳들을 또 가려고 렌터카나 택시를 이용하기도 내키지 않았다. 오직 주문진 바닷가를 거닐고 산책하고 샛길, 오솔길, 큰길… 길이란 길은 이곳저곳 걸어 다녔다.
시골 산길을 걷다 분위기 넘치는 돌계단이 있어 하나 둘 올라봤다. 계단을 오르자 양지바른 언덕에 고즈넉하게 단장돼있는 누군가의 무덤이 나타났다. 뜻하지 않게 누구인지도 모를 잠든 이에게 잠깐의 묵념을 하고 내려왔다. 묘역이 웅장하지 않지만 품위 있어 보였다. 후손의 정성스러운 손길이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언덕 위 양지바른 묘역을 보니 잠드신 분이 대단하기보다 이렇듯 품격 있게 관리하고 계신 후손이 더 대단해 보였다.
양지 바른 언덕 위에 자리잡은 무덤. 존경심을 담은 후손의 손길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산책길 옆으로 고즈넉하게 자리잡고 있는 인상적인 곳이었다. Photo by malee
이렇게 막 돌아다닌 끝에 의외의 산책 코스를 발견했다. 주문진 바닷가 건너편 향호리에 위치한 호수, 향호다. 향호는 강릉 경포대, 고성의 송지호와 함께 강원도의 대표적인 석호라고 한다. 석호란 파도가 해변의 모래를 밀어 올려 둑을 쌓고 모래섬이 커지면서 바닷물이 다시 바다로 돌아가는 길을 막아버려 생긴 호수다. 돌아갈 곳을 잃어버려 그곳에 정착한 실향민 혹은 이민자 같다. 마치 내 신세라고나 할까?
바다 깊이가 얕고 밀물 썰물의 차이가 큰 서해안은 갯벌이 발달하여 석호가 생기기 어렵지만 동해안을 끼고 있는 강원도와 함경도에는 큰 석호가 많다고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경포대가 가장 큰 석호 중의 하나이며 향호는 주문진 바닷물이 돌아가지 못한 작은 석호인 것이다.
향호 주위에 나무데크가 설치돼있어 호숫가를 한바퀴 산책할 수 있다. Photo by malee
향호를 지나는 트래킹 코스도 발견했다. 이른바 강릉 바우길 13구간 바람의 길이다. 이 바람의 길은 주문진 해변에서 시작해 산간으로 들어오는 고속도로 교각을 지나 향호 호수 제방을 따라 산길까지 15km 구간을 트래킹 하는 코스다. 산길을 거닐며 바닷바람을 맞을 수 있어 바람의 길이라고 불린단다. 이름이 예쁘다.
강릉 바우길은 제주 올레길의 성공에 자극받아 지난 2009년도부터 개발됐다고 한다. 강원도 말로 바위를 가리키는 바우를 접목시켜 백두대간의 시작인 강원도의 트래킹 코스를 일컫는 말로 정착됐다. 기존 산악 등산로와 연결돼 손쉽게 개발된 코스 이외에도 바우길 개척대가 신설한 코스 등을 합해 현재는 총 19구간으로 확대됐고 2010년부터 사단법인 강릉 바우길이 설립돼 스토리 텔링과 코스 개발 등을 맡고 있다고 한다.
산에 난 오솔길 등산로를 걷는 즐거움도 즐거움이지만 강릉 바우길 13구간 바람의 길 묘미는 향호 호수를 한 바퀴 도는 둘레길이다. 산책을 편하게 할 수 있도록 호숫가 옆에 나무 데크를 설치해 바로 옆에서 호수를 노니는 물새들을 바라보며 갈대숲길을 따라 걷다가 주문진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흐르는 땀도 식힐 수 있다.
중간중간 설치한 등나무 쉼터 벤치에 앉아 동네 촌로가 가꿔놓은 정갈한 경작지에서 자라는 야채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치 내 집 뒷마당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것 같은 편안함을 맛보게 된다.
등나무 벤치에 앉아 노래 한 곳을 듣고 일어났다. 이제 주문진 바닷가로 향할 참이다. 이른 아침 막국수 한 그릇으로 채운 배가 신호를 보낸다. 회는 언제 먹을 것이냐고요? 자 이제 주문진 바닷가를 향해 걸어가 본다.
호숫가를 따라 걷다 힘이 들면 군데 군데 있는 등나무 벤치에 앉아 휴식을 취할 수 있다. 뒷쪽 편 너른 벌판을 바라보면 싱그러운 초록색으로 눈의 피로가 풀리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관광객들이 모여 있는 주문진 바닷가에서 벗어나 소돌 해변 쪽에서 들어가면 식객 허영만 화백의 백반 기행에서 소개한 섭국 전문점 미경이네 횟집이 나온다. 메뉴를 찬찬히 살피다 일단 오늘은 회를 먹고 섭국은 내일 아침 식사로 도전해보기로 했다.
자연산 회와 소주 각 1병씩으로 적당한 운동의 피로를 풀었다. 부산스럽지 않은 여유로운 이 여행이 편안하고 즐거웠다. 이른 저녁에 술 한 잔까지… 바닷가를 걷다가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해변을 어슬렁 거리다 보니 무슨 버스 정류장 앞에 외국 여학생들이 까르르르 웃음을 지으며 사진을 찍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호기심이 발동해서 버스 정류장을 살펴보니 2017년 BTS가 발매했던 봄날 앨범 쟈켓 사진을 촬영했던 향호 해변이라는 설명이 보인다. 세상에나! 소가 뒷걸음질 치다 파리 잡았구나. 버스정류장 부스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우리 역시 라인업을 하고 쪽빛 바닷가를 배경으로 녹슨 버스 정류장에서 인생 샷 한 컷을 건졌다.
2017년 BTS가 발매했던 봄날 앨범 쟈켓 사진을 촬영했던 향호 해변의 버스 정류장. Photo by malee
아무 할 일 없이 바닷가를 어슬렁거리는 일은 인생에서 몇 손가락 꼽을 정도의 중대 사건이다(?).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났다면 몰라도 연령대별로 해야 하는 과업에 낙오하지 않고 패스하기 위해 우리는 늘 여유가 없었고 발을 동동 구르며 바쁘게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지하철 환승 칸을 체크하며 바꿔 탈 때마다 종종걸음으로 칸을 옮겨 다녔고 지하철에서 내려 버스로 환승하는 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에스컬레이터를 성큼성큼 걸어 다녔다. 이제 내 인생의 숙제는 다 끝났고 난 나의 길을 찾아 이길 저길 돌아다녀본다. 나에게 맞는 길은 어디 있는지 이 길은 맞는 길인지 또 이 길은 어디로 맞닿을 길인지.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집으로 돌아왔다. 내일이면 서울로 올라가야 한다. 마지막 할 일 하나가 남았다. 섭국을 맛보는 일. 미각여행의 끝을 보고 말리라.
둘째 날 아침 역시 닭들이 한 건했다. 이른 아침 짐을 챙겨 일단 미경이네로 향했다. 아침 식사로 섭국을 맛보기 위해서다. 섭은 자연산 토종 홍합으로 옛날 어민들이 쌀이 귀하던 시절에 채소에 밀가루 반죽을 입혀 홍합을 듬뿍 넣어 밀가루 묻힌 채소를 넣고 매콤하고 알싸하게 끓여 먹었던 국이라고 한다.
음식에 대한 자부심이 넘치시는 사장님이 서울 촌놈들을 대상으로 섭의 유래와 섭국 끓이는 법까지 일장 강의를 한번 하신다. 강의가 끝난 후 섭국이 나왔다. 우리가 자주 먹는 국밥의 내용물이 홍합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하다. 해장에도 좋고 아침 식사 한 끼로도 충분했다.
섭국
우리가 식사를 다 한 것을 본 사장님 또 출동. 허영만 선생이 섭 미역국은 모범생, 섭국은 깡패 같은 맛이라고 설명했다며 우리에게 맛이 어땠는지 음식 평을 물어보신다.
아! 집요한 사장님. 이래서 성공했구나. 우리 둘은 “알싸한 맛이 깡패 같아요… “ 대답해줬다. 매우 흡족해하신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해안가 산책을 한번 더 하기로 했다. 어슬렁거리며 해안가 도로를 걷다가 언뜻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어 가까이 가봤다. 도로변 나뭇가지에 나란히 꼬챙이에 꽂혀서 오징어가 말려지고 있었다. 다리는 모두 잘린 채. 오징어 사이사이로 보이는 쪽빛 바다, 쪽빛 하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