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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lee Oct 05. 2020

몰락한 역사, 미륵사지 석탑의 귀환

힐링 글쓰기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했던가?

패자의 역사는 폐허 더미에 묻히거나 전설로만 전해 내려온다.

그래서일까? 기를 쓰고 남을 짓밟아 승자로 남고 싶어 하는 이들은 유독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남들보다 더 높은 탑을 쌓고 더 큰 영토에 집착하며 영역 표시에 목숨을 건다.


하지만 하나는 맞고 하나는 틀리다. 역사는 승자를 주로 기록하지만 패자에게도 눈길을 준다. 아니 후세의 이야기꾼들은 승자보다 패자에게 더 감정이입을 하며 가슴 절절한 이야기들을 만들어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댄다. 태생적으로 아웃사이더 기질을 갖고 태어난 이야기꾼들의 귀에는 승자보다 드라마틱한 패자의 삶이 더 솔깃 해지기 때문이다.


쓸쓸하기만 했던 백제 유적지, 미륵사지 복원으로 옛 영광 되찾아

백제가 지배했던 지역을 여행할 때면 어쩐지 쓸쓸하다. 지금은 그나마 좀 나아졌지만 90년대까지만 해도 이 지역 역사 현장들은 남루하고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웅진백제 시대의 도성이었던 공주를 처음 방문했을 때가 1990년 가을. 공주에 가면 으레 그곳에 가야 한다는 일행을 따라 방문한 무령왕릉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 역사적인 유적지, 옛 백제의 왕이 묻혀 있었던 지하 무덤방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었다.


물론 관람객을 차단하는 유리벽이 있었지만 그리 튼튼해 보이지도 않았다. 개인적으론 왕의 무덤을 봤다는 두근거림이 있었지만 곧이어 역사적 유물을 일반인에게 개방한다는 것이 너무 위험해 보였다. 결국 97년경 유리벽에 곰팡이가 생기고 물이 새는 등 여러 문제가 발생하면서 공주 무령왕릉을 비롯해 송산리 고분의 석실 관람이 전면 금지됐다고 한다. 현재는 모형전시관에서만 그 형태를 유추해볼 수 있게 됐다.


미국에서 돌아와 근 26년 만에 다시 공주 송산리 고분을 방문했을 때 무덤방 개방이 전면 금지된 것을 알고 아쉽기는 했지만 이제야 제대로 문화재를 보존하고 있다는 안도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일본 강점 시대 도굴꾼보다도 더 졸속으로 17시간 만에 유물들을 꺼내 옮겼다는 무령왕릉 발굴은 두고두고 한국 고고학계의 수치이자 치욕으로 남아있다고 한다. 당시 발굴 단장이었던 서울대 고고학과 (고)김원룡 박사의 회고록은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고구려 유적지는 대부분이 북한 지역에 위치해 있어 비교 대상이 신라 밖에 없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백제의 유물들만 유독(?) 수난을 당하는 건 아닐까 싶은 의혹도 든다. 사실 경주를 방문할 때 느껴지는 깔끔하고 웅장한 박물관이며 유물 단장 상태를 보면 이런 의혹이 근거가 아주 없지 않은 듯하다.  


근데 최근에 이런 의혹을 한순간에 없애주는 곳을 다녀왔다. 익산의 미륵사지 터다. 일제 강점 시대였던 1910년, 조선총독부가 무너지기 전 미륵사지 석탑을 실측하고 무너져 내린 석탑 뒤로 콘크리트 땜질 처방으로 세워놓았던 미륵사지 석탑.

1910년도에 촬영된 미륵사지 석탑의 모습. 현재 동탑이 세워진 자리는 비워져 있고  왼쪽에 무너져 내려가고 있는 서탑의 모습이 보인다.  (출처 문화유산 채널 영상 화면 캡처)


지난해 4월 말, 몰락한 왕조의 찬란한 유산이 마침내 20년의 해체와 복원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 준공식을 한다는 기사를 보고 난 후, 익산 미륵사지 터를 꼭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익산 여행이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전남 지역을 한번 훑고 전북을 돌아다닐 계획이 차일피일 늦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차에 지난 7월, 전남 장성 필암서원 취재차 가야 할 일이 생겼다. 이렇게 해서 지난해부터 벼르던 익산을 코스에 넣어 일정을 짜게 됐다.


미륵사지 동석탑, 4년 전 방문했던 일본 나라의 호류지 목탑과 유사해 깜짝 놀라

마침내 익산의 미륵사지 터를 방문했다. 비가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여름 끝자락 주중이라 그런지 찾는 이 없이 고즈넉하게 미륵사지 터 곳곳을 살펴보았다. 복원해 놓은 미륵사지 동탑 석탑에서 어디선가 본 듯한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지난 2016년에 일본 교토를 여행한 적이 있었다. 교토 여행 마지막 날, 나라의 호류지를 찾아가기 위해 일본 시골을 헤집고 돌아다니던 기억이 샘솟았다. 호류지에서 봤던 5층 목탑과 그 위의 풍탁까지… 복원해 놓은 미륵사지 동석탑의 모습이 호류지에서 보았던 목탑과 형태가 정말 똑같았다.


당시 교토를 건너가기 전 한국에서 경주 여행을 마치고 다음날 일본으로 넘어갔기 때문에 그 해의 여름 여행은 마치 천년의 시간과 공간이 확 건너뛴 듯한 아주 특별하고 소중한 경험이었다. 이런 인상적인 경험 때문이었을까? 미륵사지 터에 복원된 동탑을 보는 순간 4년 전 뜨거웠던 그해 여름, 찾는 이 없이 적막했던 호류지 사찰 경내의 그 목탑이 불현듯 떠올랐다.

일본 나라에 위치한 호류지의 목탑이 오른쪽에 보인다. 옆에는 금당법당. Photo by malee


백제, 고구려 장인들이 건너가 전수한 일본 아스카 문명의 꽃 호류지

일본의 아스카 문명을 꽃피웠던 쇼토쿠 태자에 의해 창건된 호류지(법륭사)는 1993년 일본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세계적 불교문화의 보고다. 호류지의 본당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로 알려져 있고 호류지의 박물관인 대보장원에는 백제에서 선물했다는 설과 백제의 후예가 만들었다는 설이 전해지는 대형 목불상 ‘백제관음상’이 보존돼 있다. 어쨌건 ‘일본관음상’이 아닌 ‘백제관음상’으로 기록되고 쓰이는 것으로 보면 백제의 찬란했던 문화가 일본에 건너와 꽃을 피웠던 것은 분명한 역사다.


호류지의 금당 내 벽화는 고구려 승려 화가인 담징이 그렸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1945년 화재로 소실됐다고 한다. 최근 소실되기 전 촬영해 놓은 사진을 근거로 디지털화된 3D금당벽화를 인터넷에서 감상할 수 있다.


◆호류지 인터넷 사이트 링크 참조. https://view.horyuji-kondohekiga.jp/


동양 최대 미륵사지 석탑, 일본이 발라놓은 콘크리트 제거하고 해체 복원 20년 걸려

미륵사지 터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감상해야 할 석탑은 당시 모습을 유추해 복원시킨 동석탑이 아니라 머릿 부분과 위에서부터 두 세 층이 사선 모양으로 서있는 서석탑이다. 국보 제11호, 동양 최대의 석탑으로 20년 동안 뒷면에 덧댔던 콘크리트를 잘게 부수고 원래 석탑을 훼손시키지 않기 위해 치아 스케일링을 하는 세밀한 기계까지 동원해 시멘트의 흔적을 말끔하게 벗겨내고 1910년대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됐다.  


일본은 1910년도 한국을 식민지화하고 문화자원을 조사하면서 유독 백제의 문화 유적에 큰 관심을 나타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미륵사지 석탑을 실측하고 빽빽하게 조사 보고서까지 만들었다고 한다. 일본인들이 미륵사지 터를 발견하고 조사를 할 당시 이미 동석탑은 아예 무너져내려 흔적만 남아 있고 힘겹게 남아 있던 서석탑마저도 무너져지는 과정이었다고 한다.

해체와 복원에 20년이 걸린 미륵사지 서탑. 왼쪽 모서리 잘려나간 부분이 역사가 잘려나간 듯 해 가만히 쳐다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Photo by malee


국립 익산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 사리장엄구 등 볼거리 풍성해

아마도 미륵사지 서석탑 뒤에 콘크리트를 발라 세워놓은 것은 자신들의 본류를 조사하고 분석하기 위해서였지 않을까? 국립 익산박물관에 가면 콘크리트에 뒷면을 완전히 기대어 흉물스럽게 숨 쉬고 있던 미륵사지 석탑을 완전히 해체하여 복원하기까지 걸린 20년의 시간 동안의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았고 서석탑을 해체하면서 발견된 사리장엄구와 출토된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또한 익산 박물관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는 다큐멘터리 (문화유산 채널 K-HERITAGE TV 제작)를 보다 보면 무너져 내린 1910년대의 미륵사지 석탑 등을 촬영한 사진까지 볼 수 있어 백제문화와 유적의 가슴 아픈 역사를 보는 듯해 한층 몰입할 수 있다.


◆유튜브 링크 참조

https://youtu.be/G67rTMCgzKI


몰락한 왕조의 유물과 유적, 권력과 화려함의 무상함 깨우치는 곳

7세기 백제의 무왕이 왕비의 청을 들어 불사를 일으켰다는 미륵사지. 중생을 구제하는 미륵불이 나타나 나라의 안녕과 백성의 평안함을 기원하기 위해 일으켰던 대규모 사찰 미륵사지는 왕조의 몰락과 더불어 오랜 시간 동안 몰락과 소멸의 길을 걷다가 기적적으로 환생했다. 물론 똑같은 모습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곳을 거닐며 고증에 입각해 해체와 복원을 하며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되살리기 위해 쏟았을 문화재 보존 관련자들의 기운이 느껴지는 것만으로도 몰락한 왕조의 유물이 이제야 온전히 평가받고 그에 걸맞게 대접받고 있다는 안도감이 느껴진다.


주춧돌만 남아 있는 미륵사지 절터.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해준다. Photo by malee


넓이가 5만 평에 달하는 우리나라 최대의 절터였다는 미륵사. 양쪽의 석탑과 가운데 목탑, 가람도 3개나 있었다는 3 탑 3 금당의 구조로 그 웅장함과 화려함을 자랑했다는 미륵사지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지만 절터 뒤편을 병풍처럼 막아서고 있는 안개 머금은 미륵산 자락과 주춧돌만 남아 옛 영광을 유추해볼 수 있는 광활한 절터를 걸어본다.  


흔적 없이 사라진 화려한 유물 대신, 세월의 이끼 낀 주춧돌만이 시간의 영겁과 헛되고 헛된 화려함을 누르고 2020년 후손들을 만나 ‘역사란 무엇인가’를 말해주고 있다.


일몰 후 두 석탑에 조명이 들어오면 역사의 향기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Photo by ma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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