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를 찌다 생각이 허를 찌르다
해마다 팔월 초에는 시골에 온다
특별한 휴가는 늘 시골에서 시작된다
올해도 나의 휴가는 이렇게 시작되고 끝이 난다
그리고 생각이 지나고 일부는 기록으로 남는다
독자를 위해 멋을 부리거나 유려한 글은 없을지도 모른다
잠시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서 사진 몇 장 올려본다
문화기획자 과정에서 어찌 운 좋게 멘토로 활동하게 되었다
사전 모임에 갔다가 얻어 온 그림 한 장
날씨가 더우니 골목 화분에 물 주는 일도 일이다
서울에 강의 시연이 있어 갔다가 아들이 찍어둔 63빌딩
그래, 나는 63빌딩을 보려고 수학여행을 갔었다
녀석의 셀카가 제법 웃긴다
그리고 고향으로 향하기 전날 나는 이렇게 도시에서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고성 영천강에 들러 잠시 부러움에 눈만 돌리다 집으로 왔다
엄마와 함께 하기 위해서? 아니면 그냥 자식들을 엄마와 함께 보내도록 하기 위해서
봄에 심어둔 도라지가 잘 자랐다 농사도 지어본 놈이 안다고 나는 잘 못하나 보다
손주는 할머니의 방학숙제를 돕는다
산수 문제도 알려드리고 국어 문제도 알려들린다
거제에서 아직까지 순수 청년들과 거의 막바지 수업을 마치고 다시 고향으로 출바
보이지도 않지만, 폼이라도 잡아보자고 산 선글라스
딱 사진 찍을 때만 쓴다
술에 취해 하루를 고향 형님과 보냈다
환갑이 넘은 형도 형은 형이다
물놀이와 백숙
물놀이를 하면서 그냥 동네 바다에서 잡은 새우가 들어간 백숙을 먹으니 간밤의 숙취는 해소된다
그래도 피곤하다
다시 집으로 오니 이제 저 깨가 문제다
저녁 6시가 넘어서 밭으로 갔다
깨를 쪘다(베었다)
땀이 온 몸을 적셨다
얼굴은 금새 젖어버렸다
깨를 찌면서 온갖 상념이 들었다
늦게 심으나 빨리 심으나 좋은 깨는 잘 자라고, 못된 깨는 벌써 입을 벌려 깨알을 밭으로 뿌리고 있다
잘된 깨와 못된 깨의 차이를 보면서 든 생각
식물도 환경이 중요하다
같은 씨를 뿌렸지만 잘 자라는 놈이 있다
막 자라는 놈이 있다
철을 잊고 먼저 익어 날뛰는 놈이 있고 철 모르고 익어버린 놈도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말이야
잘된 깨는 손이 그리 가지 않는데 못된 깨는 손이 너무 많이 간다
깨를 찌는 정성도 두 배는 더 든다
못된 깨를 골라가며 쪄야 하니 짜증이 나서 막 하고 싶은 마음도 드는데
이상하게 그 못된 깨조차 튀어 나갈까 조심스럽다
사람 살이도 이와 다를 바 무엇일까
잘난 자식은 내버려둬도 잘 되니 그리 걱정도 손이 가지도 않는다
이상하게 못난 놈이 눈이 가고 손이 가고 마음이 아프다
신기한 일이다
깨를 지는 엄마를 보면 화가 난다
썽이 난다
작년과 꼭 같은 옷을 입고 작년보다 조금 더 구부정해진 허리를 보노라면 화가 난다
자식인 나 자신에게 화가 난다
엄마에게 깨는 어떤 의미일까
깨는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이 조그만 알갱이를 모아 한 되를 만드는 그 정성에 화가 난다
아무도 그 정성을 알지 못하리라
깨를 찌고 깨를 털고 말리는 과정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철모르고 익어가는 깨가 한정없이 밉기만 하다
나는 엄마에게 어떤 깨였을까
잘된 깨는 아닌 듯하다
그저 그런 못난 깨에 불과했겠지
그러니 늘 엄마의 마음에 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안경은 땀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렇게 땀을 한가득 흘리고 나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질 듯하다
내일 아침에도 엄마는 깨를 찌러 나올 것이다
물론 나도 나오겠지
하지만 깨를 바라보는 마음이야 엄마만 할까
꼭 두 시간이 지나니 어둠이 내린다
이제는 진짜 집으로 가야할 시간이다
깨를 찌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깨는 도대체 왜 이렇게 생겨먹었을까
깨 한톨이 기름 한 방울이 되면 얼마나 될까
땀의 가치만큼 깨가 고소할까
깨는 엄마에게 무엇일까
나에게 깨는 무엇일까
깨나 사람이나 환경이 중요하다
못난 깨가 더 정성이 간다
나는 엄마에게 어떤 자식일까
내 자식은 나에게 어떤 존재일까
우리는 살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엄마는 아직도 머리를 빗는다
이제는 숱이 없어 비녀를 꽂지 못하지만 여전히 엄마의 머리칼은 처녀때와 같다
월요일 아침! 새벽에 깨를 조금 찌고 엄마를 모시고 고성 장에 갔다
엄마 병원에 다녀와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고
엄마는 다시 엄마의 일상으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