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아들의 출생을 되돌아보며
제목 : 그 해 크리스마스
“최선을 다해 보겠지만, 아무래도 마음의 준비도 하시는 게…….”
말을 맺지 못하는 의사를 향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뭔가 말을 해야 했지만, 아니 의사의 멱살이라도 잡아야 했지만. 그러나 그냥 멍하니, 그렇게 바보처럼.
“살려 주세요. ……. ”
2005년 크리스마스이브는 새로운 희망으로 가득 찼다. 녀석이 태어나면 그동안 힘들었던 삶에 빛이 될 것이다. 조산 위험이 있어 두 달을 병원 생활을 하는 아내에게 미안함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말 좋은 아버지가 되리라 다짐했다. 결혼 후 사업 실패에도, 날 믿으며 따라준 아내에게 좋은 남편이 되리라 다짐하고 또 했다.
‘예수가 태어난 시간에 녀석이 나오려나?’
그렇게 시간은 자정을 넘어 새벽 2시를 향하고 있었다. 분만실에서 아내의 손을 잡았다. 아내 곁에 놓여있는 가위를 보자 심장이 흔들렸다. 그렇게 힘들게 아기가 나오는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내는 긴 시간을 고통에 일그러져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진통이 온 지도 꽤 된 듯했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곁에서 살피는 사람도 느낄 수 없었다. 의사가 아내의 배를 눌렀다. 아이가 나오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아이의 머리가 살짝 비쳤다. 혹시나 방해가 될까 멀찌감치 떨어져 바보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가위를 살짝 들었다. ‘이제 나도 아버지가 된다. 여보, 고마워.’ 고통스러워하는 아내를 뒤로하고 나는 아버지가 된다는 기대에-지금 생각하면 참 남자들이란 골 때리는 족속이다.- 부풀어 있었다.
‘이제 탯줄을 자르면 되는 건가?’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겐 탯줄을 자르는 영광은 오지 않았다. 의사는 급하게 탯줄을 자르고, 아이를 포대기에 싸서 사라졌다. 멍하니 그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잠시 시간이 흐르자, 아내의 창백하게 지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괜찮아? 수고했어. 그런데 애는 왜 저리 급하게 데리고 가지?” (역시 남자란 참 못난 족속임을 다시 느낀다.)
“괜찮아. 가끔 이러기도 해.” 입원한 병원의 신생아실에 근무하는 아내는 덤덤한 목소리로 나를 위로했다. 아내 곁에 있던 나를 간호사가 나가서 기다리라고 했다. 남자는 참 단순했다. 아내의 말에 나는 그냥 그런가 싶었다. 대기실에 앉았다. 시간은 고인 물처럼 썩어가고 있었다. 의사가 나를 부르자, 시간이 되살아났다.
탯줄이 아이의 목을 두 번 감았다고 한다. 자궁에서 나오는 시간이 지체되어 뇌에 산소공급이 부족하다고 했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급하게 인큐베이터로 옮겨야만 했다고 했다. 그리고 나에게 말했다.
“최선을 다해 보겠지만, 마음의 준비도 하시는 게…….”
병원 밖으로 나와 담배를 물었다. 원래 눈물도 많은 편이데, 주책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아니, 그동안 아내를 애먹이고, 신경 쓰이게 하면서 살았던 나 자신을 죽이고 싶었다. 사업 부진으로 직원들 급여에 보태느라 늘 아내의 월급을 훔쳤다. 그러면서도 온갖 폼은 다 잡고 다니느라 온갖 모임에 잦은 술자리. 늦은 귀가. 집에는 돈 한 푼 없어도 체면치레는 하고 살아야 했다. 떡볶이가 먹고 싶다는 아내를 기다리다 지쳐 잠들게 한 적도 많았다. 동네 축제에 가자고 해도 몇 천원이 없어 나가지도 못했다. 임신을 한 아내에게도 참 못난 남편이었다. 태교를 해도 모자랄 판에 엄마에게 스트레스를 주니 어찌 아이가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겠는가? 지난 몇 년간의 잘못이 영화 필름처럼 잘도 돌아갔다. 세상에서 나만큼 못난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렇게 원하던 아이를 얻고도, 임신 동안이라도 잘해주지 못했던 나 자신을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정신을 차리고 아내에게 갔다. 잠든 아내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쩌면 아내도 잠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내가 살짝 눈을 떴다.
“아이는?”
“괜찮데. 조금 급해서 인큐베이터에 있데. 당신이 나중에 의사 오면 한번 물어봐.” 아내를 쉬게 하고 난 다시 의사에게 갔다. 확인을 하고 싶었다. 아니 의사에게 당부를 하고 싶었다. “집사람 몸 좀 나아지면, 직접 아이 보게 해 주세요. 그냥 괜찮다고 해주시고요.” 그렇게 나는 한 달을 넘게 수시로 병원을 들락거렸다. 그리고 두 달이 될 때쯤 우리의 복덩이는 집으로 왔다. 그러나 나의 죄 값은 그렇게 끝나지 않았다. 아이가 자라면서, 걷는 것이 불편해 보였다. 병원에 진찰을 갔다. <백질 연화증> 처음 듣는 생소한 말에 덜컥 겁이 났다. 하반신 마비가 올 수 있다고 했다. 태어날 때, 두뇌에 산소 공급이 부족해서 뇌의 백질 부분이 문제가 생겼다고 했다. 또 한 번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정말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가진 것은 몸 하나, 내가 줄 수 있는 사랑을, 온 사랑을 쏟으며 아이를 키웠다. 단지 그것이 전부였다. 아내에게 더 고마워하며, 아이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을 주었다. 이제는 2학년 동생을 돌봐주는 어엿한 형으로 잘 자라준 아들에게 너무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