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쓰를 빨다가

생각이 돌고 돌아

by 말글손

촌에 다녀오면 늘 몸이 너저분하다. 이런저런 일로 시간을 보내면 먼지도 쌓이지만 씻지 않아서 그런 건 당연지사. 시골이라 씻기 힘든 게 아니다. 하지만 씻기 힘들다.


일어나서 어머니와 애들 밥을 챙기고 주변 정리하고 밭일 조금 하고나면 다시 점심. 잠시 여유를 누리다, 몸을 좀 꼼지락거리다 집어 오기 바쁘다. 더 여유를 누리며 자연에세 뒹굴다 오고 싶지만, 애들 학교가 걸리니 참 현대 생활이 팍팍하다.


집에 와서 촌에서 가져온 짐을 내리면 씻을 시간이다. 벗어던진 샤쓰가 눈에 들어오면 빨까말까 세탁기에 넣을까 손빨래를 할까 잠시 고민하다 역시 빨래는 손이지 한다. 빤스야 늘 후딱 빨고 말지만 샤쓰를 빨때면 내 몸을 다시 살핀다. 까만 칼라와 손목을 보면서 열심히 살았다는 사실보다, 누래진 겨드랑이와 등판을 보며 몸의 독소가 하얀 샤쓰를 찌들게 한다는 사실보다 게으른 나를 본다.'아, 내일 김해가야 되는데.' 잡념은 부지불식간에 훅 들어온다. 샤쓰 때를 벗기느라, 솔을 들고 박박 문때지만 찌든 시간은 다시 하얗게 돌아오지 않는다. 물론 하얗다고 다 좋은 건 아니지만. '원래 하얀 천은 실크나 목화 아닌가?' 또 잡념이.


그러고 보면 거의 모든 천은 다 합성으로 염색한거지 않은가? 누군가의 선택을 받기 위한 페르소나. 옷도 그렇구나. 이런 생각에 잠시 빨래의 행위를 잊을만큼 열심히 빨았다. 그래도 그 원색은 오지 않으니, 누군가 한번 지나간 자리는 흔적이 남을 수 밖에 없는 그런. 샤쓰를 빨고 빤스를 빨고 그러고나면 내 몸을 빤다. 내 몸에 묵은 때도 빨고나면 다시 구라분으로 몸에 때를 씌운다. 피부에 좋다곤 하지만 뭐 자연 그대로 만큼이야 할까 싶지만 지금은 지금에 맞게.


삭아가는 내 얼굴과 늘어나는 새치가 새삼 세월을 느끼게 한다. 빨기가 끝나면 다시 뒹굴거리며 몇 번이고 배추, 무 걱정인 치매 걸린 엄마와 전화 응대로 밤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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