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면 언제나 휑한 방안에는 나 혼자다. 어릴 적에는 나만의 방이라도 하나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 싶었는데. 오롯이 혼자인 시간. 혼자인 공간이 허전하기 그지없다. 이제는 두발로 뒤뚱이며 걷기는 포기했다. 네발로 기어 부엌과 화장실과 방으로 오늘 길이 멀기만 하다. 간밤의 요강을 비우려 마당에 내려오는 일도 쉽진 않다. 어쩌다 작은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 앞까지 가는 길이 삼천리다.
19살. 시집을 오기 전에는 나만의 방이라도 하나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 싶었다. 온 식구가 두 개의 방에 포개지듯 잠을 잤다. 오빠가 결혼을 하면서 방 두 개는 고사하고, 방 하나에 온 식구가 포개지듯 잠을 잤다. 시집을 와서도 별반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잠시 남편과 한방을 쓰다 형님네 식구들도 늘고, 나도 자식을 낳으니 더 이상 한 집에서 살 수가 없었다. 고모들은 시집을 갔고, 남편과 나는 형님네 집 바로 위 논에 집을 지어 분가를 했다.
부엌 하나, 방 두 칸. 드디어 나만의 공간이 생겼다. 부엌. 하루 중 들에 일하러 나가기 전 새벽에 잠깐, 해질 녘 저녁밥을 짓기 위해 잠깐 있는 나만의 공간이지만 나만의 공간은 그렇게 또 다른 나의 방이 되었다. 그 사이 아이들이 태어났다. 계획을 한 건 아니지만 첫째부터 2-3년을 터울로 넷째가 태어났다. 부부 금술이 좋았을까. 다섯째가 6년 만에 태어나고, 내 나이 마흔에 막내가 태어났다. 막내는 도무지 키울 자신이 없어 어쩔까 고민을 했지만, 그때는 그랬었다. 그냥 낳았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여덟 식구가 코딱지마한 방 두개에서 바글바글 했다. 살 수가 없었다. 고방 옆에 아랫방을 만들고, 또 고방 옆에 윗방을 만들었다. 흙벽으로 지은 본채보다 시멘트 건물은 생각보다 빨리 지었다. 그 사이 아이들이 점점 크면서 방은 다시 작고 작아졌다. 나만의 공간이었던 부엌도 아이들과 함께 쓰는, 아니 함께 쓰는 부엌이 되었다. 가마솥에 쌀을 안쳐 밥을 짓고, 작은 방 가마솥엔 소죽을 끓여야 했다. 군불을 때야 난방이 되니, 겨울에는 굴뚝이 쉴 날이 없었다.
큰 아들이 결혼을 하면서 나만의 공간은 영원히 사라지는 듯했다. 부엌은 며느리에게, 방은 아이들의 공부방이 되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아이들도 도시로 공부하러 나가고 그 사이 큰 아들 내외도 시골생활이 싫다며 읍내로 분가를 했다. 시간이 흐르면 공간도 변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좋았을까? 막내가 도시로 떠난 1990년. 그때는 온전히 나만의 공간이 생겼다. 온전히 나만의 방이 생겼다. 잠시라도 행복했을까. 나만의 공간이 생겨 편하고 좋다고 생각했을까.
허전함. 집을 떠난 자식들이야 종종 찾아왔지만, 나의 공간은 여전히 저 밭이요, 저 논이었지. 단 한 번도 내가 쉬는 방이요, 내가 밥을 차리는 부엌조차 나만의 공간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이제 내 나이 89. 88년을 살아왔으니, 온전히 내 방이 참 좋다. 밥을 차려주러 오는 요양보호사가 오는 2시간을 제외하면 오롯한 나만의 시간이 참 좋은데, 나만의 공간이 참 좋은데, 자식들은 주간보호센터에 놀러가라고 한다. 자꾸만 기억을 잃어가는 내가 걱정인가보다.
주말마다 교대로 찾아오는 자식들이 오는 날이 기다려지지만, 매일 잊어버리니 왔다가도 기억을 못하니, 이제는 나만의 공간, 나만의 시간이 무슨 소용이랴.
이 이야기는 치매로 자꾸만 기억을 잃어가는 어머니 김복순(89)의 마음을 막내 아들이 대신 적은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