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잎이 꽃이 되는 두 번째 봄. 살아있는 많은 것들이 찬란하게 소멸을 준비하는 이 가을에 불현듯 지난 봄끄적인 글 하나가 머릿속을 맴돌아 옮겨봅니다. 2020년의 가을은 25년 뒤 나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게 될까... 생각하며 *
봄이 슬슬 끝나려 한다.
아카시꽃이 활짝 피면 이제
여름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접어든 거라던가.
봄의 끝자락에서 불현듯 25년 전 봄,
그곳에서 보낸 날들이 떠오른다.
대학을 다니는 동안 학교 수서실에서 3년 넘게 근무했다. 근로장학생 개념으로 학교에서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였다. 책도 좋아하고, 전공도 마침 인문학 쪽이라 수서 업무는 내게 잘 맞았다.
도서관에 필요한 책들을 고르고, 복본이 없는지 확인해서 주문을 내고, 도서관에 들어오는 새책들을 제일 먼저 볼 수 있다는 즐거움이 컸다.
그러다 어학연수 다녀온답시고 한 학기를 쉬었으나 건강악화로 결국 못 가고, 다시 복학한 봄.
몸과 마음의 회복이 더디게 진행되는 와중에도
수서실 근무를 다시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 내게 은밀히 하나의 업무가 주어졌다.
지난 여름(1994년)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한 동문선배의 책들이 학교도서관에 대거 기증되었는데, 그 기증도서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목록을 작성하여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었다.
그 선배는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며 학교에서 강의도 하셨는데, 원래는 다른 이름이었으나 나중에 이름을 바꿨다고 했다. 개명한 이름은 '김 현'이었다.
묘하게도 서울대 불문과 출신의 유명한 문학평론가 김현과 같은 이름이었고, 그분이 돌아가신(1990년) 지 얼마 안 돼서 유명을 달리하셨다.
듣기로는 그냥 원래 이름 썼으면 오래 살았을지도 모르는데 이름을 바꾼 탓이라며 왜 이름을 그리 바꿨나 모르겠다고 동문들이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원래 이름은 모르겠고, 그분이 80학번이시니 개명은 오래전에 한 듯했다.
비개방 열람실 하나를 다 쓸 정도로 책으로 가득한 그 공간을 나 혼자만이 열쇠를 따고 들어가 목록을 작성하고, 일이 끝나면 열쇠를 잠그고 나오길 한 달여 가량 했다.
책 상태를 살피고, 책 제목과 저자와 출판사와 출판 연도를 꼼꼼히 기록으로 남기는 동안 그 책들을 보며 문학을 논하고, 강의 준비를 하고, 글을 썼을 그 선배의 모습을 골똘히 떠올리곤 했다. 오다가다 학교 안에서 마주쳤을지도 모르지만 한 번도 그분을 만난 적이 없으니 상상할 따름이었지만...
때로 책의 속표지에 쓰여진 글귀에 눈이 머물기도 하고, 읽고 싶었던 책이 나오면 잠깐 훑으며 휴식을 취했다.
죽을 뻔했다 살아난 나에게,
죽은 이의 책을 정리하던 그 시간은
역설적이게도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어디쯤에서 때로 가슴이 먹먹해졌고, 혼자서 눈시울을 붉히며 또로록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