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말그미 Oct 27. 2020

그 봄 그곳에서...

가을에 떠올리는 봄

* 모든 잎이 꽃이 되는 두 번째 봄. 살아있는 많은 것들이 찬란하게 소멸을 준비하는 가을 불현듯 지난 봄 끄적인 글 하나가 머릿속을 맴돌아 옮겨봅니. 2020년의 가을은 25년 뒤 나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게 될까... 생각하며 *


봄이 슬슬 끝나려 한다.

아카시꽃이 활짝 피면 이제

여름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접어든 거라던가.

봄의 끝자락에서 불현듯 25년 전 봄,

그곳에서 보낸 날들이 떠오른다.


대학을 다니는 동안 학교 수서실에서 3년 넘게 근무했다. 근로장학생 개념으로 학교에서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였다. 책도 좋아하고, 전공도 마침 인문학 쪽이라 수서 업무는 내게 잘 맞았다. 

도서관에 필요한 책들을 고르고, 복본이 없는지 확인해서 주문을 내고, 도서관에 들어오는 새책들을 제일 먼저 볼 수 있다는 즐거움이 컸다.


그러다 어학연수 다녀온답시고 한 학기를 쉬었으나 건강악화로 결국 못 가고, 다시 복학한 봄.

몸과 마음의 회복이 더디게 진행되는 와중에도

수서실 근무를 다시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 내게 은밀히 하나의 업무가 주어졌다.


지난 여름(1994년)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한 동문선배의 책들이 학교도서관에 대거 기증되었는데, 그 기증도서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목록을 작성하여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었다.   


그 선배는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며 학교에서 강의도 하셨는데, 원래는 다른 이름이었으나 나중에 이름을 바꿨다고 했다. 개명한 이름은 '김 현'이었다. 

묘하게도 서울대 불문과 출신의 유명한 문학평론가 김현과 같은 이름이었고, 그분이 돌아가신(1990년) 지 얼마 안 돼서 유명을 달리하셨다.


듣기로는 그냥 원래 이름 썼으면 오래 살았을지도 모르는데 이름을 바꾼 탓이라며 왜 이름을 그리 바꿨나 모르겠다고 동문들이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원래 이름은 모르겠고, 그분이 80학번이시니 개명은 오래전에 한 듯했다.


비개방 열람실 하나를 다 쓸 정도로 책으로 가득한 그 공간을 나 혼자만이 열쇠를 따고 들어가 목록을 작성하고, 일이 끝나면 열쇠를 잠그고 나오길 한 달여 가량 했다.


책 상태를 살피고, 책 제목과 저자와 출판사와 출판 연도를 꼼꼼히 기록으로 남기는 동안  책들을 보며 문학을 논하고, 강의 준비를 하고, 글을 썼을 그 선배의 모습을 골똘히 떠올리곤 했다. 오다가다  학교 안에서 마주쳤을지도 모르지만 한 번도 그분을 만난 적이 없으니 상상할 따름이었지만...

때로 책의 속표지에 쓰여진 글귀에 눈이 머물기도 하고, 읽고 싶었던 책이 나오면 잠깐 훑으며 휴식을 취했다.


죽을 뻔했다 살아난 나에게,

죽은 이의 책을 정리하던 그 시간은

역설적이게도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어디쯤에서 때로 가슴이 먹먹해졌고, 혼자서 눈시울을 붉히며 또로록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만...

난 살아남은 자였다.   


책들이 켜켜이 쌓인 폐쇄공간으로 통하는

유일한 문을 열고 나오면

바깥은 노랑 분홍 연두로

하루하루 생기를 피워 올리는 봄.

봄이었다, 살아있어서 고마운.

눈부시고 찬란하여,

내가 그 공간에 있었다는 사실을

꼭꼭 숨겨야 할 비밀처럼 묻어야 했던.


그 시간들을 통해

내 몸과 마음은 서서히 기운을 회복하고  

산 자들의 무리에 자연스레 섞여 들었다.


살면서 때로 생각한다.

굳게 닫힌 창문을 덜컹이던 봄바람과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 바람에 실려온 혼이

책장을 스륵 넘기던 그 고요한 공간,

오래전 죽은 이가 살아남은 나와 함께한

그곳에서의 봄을.



매거진의 이전글 내력에 대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