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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 가끔 일어나는 일

by 말그미

어떤 일로 마음이 우울해질 때가 있다.


[작고 귀여운 나의 행복]의 저자 밀리카는

그럴 때면 냉장고에 넣어둔 '딸기가 통째로 올라간 하얀 생크림 케이크'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엉망진창으로 어수선했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단순하게 행복해진다고 말하지만... 난 그렇게 우아하지 못해서 집에 있는 걸 닥치는대로 먹었다. 밤 10시 넘어.


어제 저녁,

일주일동안 마음을 어둡게 했던 일이

예상한대로 일단락되었지만

여전히 내 마음은 우울해서

일 끝내고,

아들과 마트를 다녀온 뒤

스쿼트 150개, 팔굽혀펴기 100개

운동인증을 끝내자마자 폭풍흡입.

(이러니 운동이 뭔 소용이냐고요~~)

하드, 쫄병스낵, 카라멜콘과땅콩, 게맛소시지

에...또... 뭐가 있었지?

결정적 한 방이 있었는데...

아, 맞다!

저녁 식사때 먹고 남은 쭈꾸미야채부침개를 먹어치웠다.

그리고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좀 보다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그녀는 다 계획이 있다]를 읽다 잠들려고 했으나...

책을 머리맡에 두고 잠시 눈을 감았을 뿐인데

눈떠보니 새벽 3시 반.

꿈속에서도 마음을 끓이던 그 일이 나와서

애면글면하다가 잠이 깼다.

잠이 깨고서도 한참을 꿈과 현실과

여전히 우울한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도 일어나자.

일어나서 뭐든 쓰자.

쓰면서 치유하자.

난 글로 치유하는 사람이잖아.

이런 생각으로 불끈 일어나

블로그를 열고 일기글을 한 편 쓴 뒤

오늘 브런치에 올릴 글을 뭘로 할까 하며

글감을 고르는데

며칠 전 필사해둔 이 글에 딱 눈이 멈춘다.

“우리 인생에는 가끔 그런 일이 일어나. 설명이 안 되고 이치에도 맞지 않는, 그렇지만 마음만은 지독히 흐트러지는 사건이. 그런 때는 아무 생각 말고, 고민도 하지 말고, 그저 눈을 감고 지나가게 두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커다란 파도 밑을 빠져나갈 때처럼.”

ㅡ 크림 / 무라카미 하루키, [일인칭 단수]​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 나오는 이 한 구절이 우울에 빠져 허우적대던 나를 구원해준다. 사실 '일인칭 단수'를 완독을 하지는 못했다.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있었지만, 지난 주부터 마음을 어지럽히는 일로 인해 집중이 잘 안 되서, 책 반납일에 맞춰 도서관에 반납하느라 중간 부분은 건너뛰고 처음 몇 편과 마지막 편만 읽었더랬다.

필사한 부분은 처음에 나온 몇 편 가운데 하나이다.

비록 책을 다 읽진 못했지만, 나에게 힘을 주는 이 한 구절로 인해 '일인칭 단수'속 '크림'은 나에게 오래 기억될 소설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언제든 손에서 책을 놓지 말아야겠다는, 완독을 하지 않더라도 내 마음에 남은 구절을 하나만이라도 건진다면 그 독서는 제 가치를 다한 것이라는 결론을 얻는다.

아무 생각 말고,

고민도 하지 말고,

그저 눈을 감고 지나가게 두기.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이다.


by 니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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