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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Dec 06. 2021

홍범도 장군이 잠드신

대전 현충원

대전에서 갈만한

올해의 핫플이자 원픽을 꼽으라면

난 두말없이 대전 현충원을 꼽을 것이다.

2021년 8월 15일은

1920년 봉오동 전투 승리를 이끈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이역만리 카자흐스탄으로부터 서거 78년 만에 고국으로 봉환되어 대전 현충원에 오신 날이다. 홍범도 장군의 유해는 8월 15일 국립대전현충원으로 봉송돼 이틀간의 국민추모제를 거친 뒤, 8월 18일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3묘역에 안장되었다

홍범도 장군(1868~1943)은 한말의 독립운동가이다. 만주 대한독립군의 총사령군이 되어 일본군을 급습하여 전과를 거두었고, 독립군 본거지인 봉오동 전투에서 독립군 최대의 승전을 기록하였으며, 청산리 전투에서는 제1연대장으로 참가하였다. 그 후 항일단체들의 통합을 주선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 부총재가 되었으며, 고려혁명군관학교를 설립했다.


1937년 스탈린이 실시한 한인강제이주정책으로 카자흐스탄의 야니쿠르간 사나리크로 이주했다가, 이듬해 크질오르다에 정착하였다. 말년에는 한인극장인 ‘고려극장’에서 수위로 근무하는 등 비교적 조용한 여생을 보내다, 1943년 10월 25일 돌아가시면서 카자흐스탄에 묻히셨다. 그런데 장군님의 유해가 뒤늦게나마 고국으로 돌아와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는 것이다.


광복절 무렵에 이 소식을 듣고, 사람들 발길이 좀 뜸해지면 찾아가야지~ 하고 있다가(코로나 핑계?) 11월 27일 토요일 오전에 다녀왔다. 파랗고 맑은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전형적인 한국의 가을날이었다.

독립유공자 제3묘역의 입구에 안장된 홍범도 장군의 묘는 주차장 바로 위에 있어서 찾기가 쉬웠고, 무엇보다 꾸준히 찾는 이들이 있어서 한눈에 들어온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버스를 타고 온 한 무리의 사람들이 막 참배를 마치던 참이었고, 우리가 참배를 마칠 무렵엔 아이를 데리고 온 한 가족이 묘를 찾아왔더랬다. 고국에 돌아오신 지 100일이 지났지만 여전히 홍범도 장군님을 찾는 이들이 끊이지 않는 풍경이 보기 좋았다.

우리가 갔던 날은 마침 장병 1묘역과 독도의용수비대, 의사상자, 소방공무원 묘역 사이에 있는 메타세콰이어 가로수가 단풍절정에 이른 때여서 현충원의 대표적인 가을풍경 속을 걸어볼 수 있었다. 올 때마다 느끼지만 현충원은 참 아늑하고 평온한 장소이다. 이 좋은 곳에 홍범도 장군님이 편히 잠드셔서 참 다행이다.

현충원이 위치한 대전 유성구에서는 홍범도 장군 유해가 봉환된 국립대전현충원 앞 도로 2.02㎞ 구간에 명예도로명 ‘홍범도장군로’를 지정하고, 표지석을 세워 장군에 대한 예우를 갖추었다.

대전 오시면 이 홍범도장군로를 거쳐서 대전 현충원에 들르셔서 홍범도 장군님을 알현하고 가심이 어떨까?

현충원 내부도 아름답지만 현충원을 둘러싼 보훈둘레길은 많은 분들이 사색을 하거나 둘레길을 따라 도보여행도 할 수 있는 시민들의 휴식처로도 이용되고 있는 곳이다. 보훈둘레길은 현충원 주위를 둘러싼 트레킹길로 산책하기 좋고 총 7가지의 코스를 즐길 수 있어 언택트 여행을 원하는 사람에게 안성맞춤이다.

*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 과정

2019년 4월, 문 대통령이 카자흐스탄 국빈 방문 당시 토카예프 대통령에게 협조를 요청하면서 본격 추진되었고, 이후 2020년 3.1절에 유해 봉환이 결정된 뒤 봉오동 전투(1920.6.7) 전승 100주년을 기해 홍범도 장군을 모시려 했으나 코로나 사태로 봉환이 연기되었다가 이번 카자흐스탄 대통령 방한을 계기로 성사되었다.

지난 8월 14일, 문재인 대통령은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을 위해 황기철 국가보훈처장과 여천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이사장 우원식 국회의원, 배우 조진웅을 카자흐스탄 특사단으로 파견했다.

특사단은 크즐오르다에 위치한 홍범도 장군 묘역에서 카자흐스탄 정부 관계자 및 고려인협회와 함께 추모와 제례로 유해를 정중히 모시고 군 특별수송기 KC-330으로 봉송, 카자흐스탄 상공을 3회 선회한 후 대한민국으로 출발했고, 우리 영공에 진입한 후에는 공군 전투기 6대의 엄호를 받으며 서울공항에 도착, 문재인 대통령 내외와 김영관 애국지사 등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식이 진행되었다. 태극기로 관포된 홍 장군의 유해는 <올드 랭 사인>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공항에 마련된 제단에 안치됐는데, 이 노래는 1896년 11월 독립문 정초식에서 배재학당 학생들이 합창한 것을 시작으로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국가처럼 불리던 곡으로 알려져 있다. 추모식 뒤 홍 장군의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으로 봉송됐으며, 8월 16∼17일 이틀간의 국민추모제를 거친 뒤 8월 18일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3묘역에 안장됐다.  

조진웅은 영화 '암살(2015)'에서 신흥무관학교 마지막 졸업생 출신 독립군이자 암살단 요원 가운데 최연장자인 추상욱을 연기했다. 그는 죽음으로써 끝까지 임무를 완수하고자 하는 의지의 독립군 역을 실감 나게 연기했다. 또한 '대장 김창수'에서는 백범 김구 선생의 청년 시절 이름인 '김창수' 역을 맡았는데, 1896년 20살의 나이로 황해도 안악 치하포에서 일본인을 살해하고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는 내용을 다룬 영화이다.


이러한 역을 훌륭히 소화해낸 조진웅은 독립가다운 이미지가 강하고 실제로도 애국심, 특히 일본을 대하는 태도가 딱 부러진 배우로 알려져 있어 이번 홍범도 유해 송환 특사로 선발된 듯하다. 정부의 기대대로 그는 특사 임무를 충실히 실행해 홍범도 장군 유해를 안전하게 고국의 품으로 모셔 왔다. 이 과정은 KBS1에서 2021.8.26. 방영한 <국민특사 조진웅 홍범도 장군을 모셔오다>에 자세히 소개되었다.


* 홍범도 장군의 일생이 궁금하다구요?

그는 1868년 8월 27일 평안북도 자성[일설에는 평안북도 양덕(陽德) 또는 평양이라고도 함]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갑산으로 이사한 뒤 수렵과 광산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1907년 전국적인 의병봉기에 자극을 받고 있던 중 이 해 9월 일제가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공포하고 포수들의 총을 회수하려 하자, 산포대(山砲隊)를 조직한 뒤 삼수·갑산 지방 포수들의 총포를 회수하러 온 일본군을 대적하여 북청·후치령을 중심으로 갑산·삼수·혜산·풍산 등지에서 유격전을 벌여 격파하였다. 이 싸움에서 그는 9시간의 전투 끝에 적을 전멸시켰다.


1910년 한국이 일제에 의하여 강제 점령되자 소수의 부하를 이끌고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 양성에 전력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대한독립군의 총사령이 되어 약 400명의 독립군으로 1개 부대를 편성, 국내에 잠입, 갑산·혜산·자성 등의 일본군을 급습하여 전과를 거두었다.1920년 6월 반격에 나선 일본군이 독립군 본거지인 봉오동을 공격해 오자, 700여 명의 독립군을 지휘하여 3일간의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일본군 157명을 사살하였다. 이 봉오동 전투는 그때까지 독립군이 올린 전과 중 최대의 승전으로 기록된다. 같은 해 10월에는 청산리 전투에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와 함께 제1연대장으로 참가하여 큰 공을 세웠다.


그 뒤 독립운동단체가 흑룡강의 국경지대에 집결하자 항일단체들의 통합을 주선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고 부총재가 되었다. 대한독립군단은 1921년 러시아령(領) 자유시(알렉세예브스크)로 이동하여 스랍스케 부근에 주둔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6월 소련 당국의 한국독립군에 대한 무장해제령으로 빚어진 자유시사변(事變)을 통하여 많은 독립군이 희생되고 말았다. 이후 홍범도는 남은 독립군 부대와 함께 이르쿠츠크로 이동하였고, 레닌 정부의 협조를 얻어 설립된 고려혁명군관학교에서 혁명군 양성에 참여하기도 했다. 1922년에는 다시 연해주 이만으로 돌아왔으며, 1923~24년 무렵부터는 그곳에서 콜호스(집단농장)를 차려 농사를 지으며 한인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937년 스탈린이 한인강제이주정책을 시행하면서 연해주의 한인들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다. 홍범도는 카자흐스탄의 야니쿠르간 사나리크로 이주했다가, 이듬해 크질오르다에 정착하였다. 1941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러시아 정부에 참전을 요청했으나, 고령을 이유로 거부당하였다. 카자흐스탄의 한글신문 《레닌기치》에 젊은이들의 참전을 촉구하는 기고문을 싣기도 하였다.


말년에는 한인 극장인 ‘고려극장’에서 수위로 근무하는 등 비교적 조용한 여생을 보냈다. 그렇지만, 카자흐스탄 한인 사회에서 독립군 장군 홍범도의 영웅적 업적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생전에 이미 고려극장에서 그의 항일투쟁을 주제로 한 연극 ‘홍범도’가 공연되었고, 그의 일대기가 《홍범도 일지》로 정리되었다.


조국 해방을 불과 2년 앞둔 1943년 10월 25일, 이역만리 타국 땅에서 끝내 숨을 거두었다. 그의 유해는 집 근처에 임시로 안장되었다가, 2차 대전이 끝나고 중앙공동묘역으로 옮겨졌다. 1951년 《레닌기치》 기자들을 비롯한 한인들이 중심이 되어 ‘홍범도 장군 분묘수리위원회’를 조직하여 묘를 보수하고, 흉상과 기념비를 세웠다. 그가 거주하던 집은 크질오르다의 역사기념물로 지정되었고, 집 근처의 거리는 '홍범도 거리'로 지정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2019년 4월 카자흐스탄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이 토카예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장군의 유해 봉환을 요청하였고, 이에 따라 2021년 8월 15일 카자흐스탄으로부터 유해가 봉환되었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건국훈장 중 최고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고, 유해는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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