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들 뒤에서 묵묵히 독립 자금을 지원했던 이석영의 자취와 그가 이끈 6형제의 독립 투쟁을 특집 역사 다큐멘터리로 조명한다는 내용이었다.
'한 명도 아닌 여섯 명의 형제가 독립투쟁을 했다고?'
안동의 임청각을 찾았을 때 깊이 알게 된
석주 이석룡 선생 일가가 떠올랐다.
임청각을 가로지르는 철도. 아흔아홉 칸집으로 소문이 자자했는데, 일제가 독립운동하는 집안이라고 일부러 이곳에 중앙선 철로를 놓으면서 행랑채와 부속채가 철거되어 지금은 50여 칸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을 지낸 이석룡 선생은 고성 이씨 가문으로 선생의 집안은 아들, 손자, 조카들까지 3대 9명이 대한민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으며 며느리들까지 독립운동을 해서 모두 11명이 독립운동 유공자로 건국훈장을 받았고, 사위들도 다섯 명이나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대단한 집안이다.
3월 5일 저녁 8시부터 KBS1에 채널 고정해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늘 새벽 김종원의 책 [내 아이의 미래를 위한 부모인문학 수업]을 읽다가 다시금 이회영과 이석영을 맞닥트리게 되었다.
- 1910년 12월 30일, 압록강
뼛속까지 파고드는 혹한의 날씨를 뚫고 50여 명의 무리가 배를 타고 어딘가로 이동한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무리를 이끌며 무사하강을 건넌 한 남자가 뱃사공에게 배삯보다 두배나 많은 돈을 내주며 이렇게 말한다.
"일본 경찰이나 헌병에게 쫓기는 독립투사가 돈이 없어 강을 헤엄쳐 건너려 하거든 나를 생각해서 그를 배에 태워 건네주시오"
듣기만 해도 기품이 넘쳐흐르는 이 말을 남긴 사람은 백사 이항복의 10대 손인 우당 이회영이다. 백사 이래 9대조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정승, 판서, 참판을 지낸 손꼽히는 명문가의 일원이었고, 둘째 이석영은 무려 양평에서 서울 가는 길까지 자기 땅이 아닌 곳이 없었다는 대부호였다.
나는 단연코 그의 집안이 한국 최고의 명문가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8대를 이어 벼슬을 했고 막대한 재산을 쌓았기 때문이 아니라, 일제 강제 합병이 이루어지자 실제 가치 2조원 이상의 재산을 모두 처분해 만주로 떠나 독립운동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 많은 부호가 자기만 생각하며 살았지만 이들은 다른 삶을 선택했다.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해 3,500명의 독립군 을 배출하는 등 20년이 넘게 독립운동에 매진하는 동안 그가 가져간 군자금은 바닥을 드러냈다. 그래서 하루가 아니라 일주일에 세 끼를 먹으며 살아야 했지만, 가난도 그의 애국심을 꺾지는 못했다. 일생을 일본군에게 쫓기며 엄청난 고통을 받아야만 했고 ,여섯 형제 중 다섯 형제와 대다수 가족은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굶주림과 병, 고문으로 세상을 떠났다.
여기서 하나 묻고 싶다.
"당신의 통장에 2조 원이 있고, 지금 조국에 전쟁이 일어났다면 가장 먼저 어떤 행동을 하겠는가?"
'그래, 조국을 위해 내 모든 걸 바치자'라며 모든 돈을 나라를 위해 쓰며 전장으로 뛰어나갈 것인가, 아니면 '왜 하필 지금이야! 이런 망할 놈의 세상'이라고 분노하며 돈을 챙겨 도망갈 궁리를 할 것인가?
이회영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독립운동을 결심했고, 형제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정말 슬프다. 세상 사람은 우리 가족이 공신의 후예라고 하는데, 우리 형제가 당당한 명문호족으로서 차라리 대의가 있는 곳에서 죽을지언정 왜적 치하에서 노예가 되어 생명을 구차히 도모한다면 이는 어찌 짐승과 다르겠는가?"
하나 더 묻는다.
“당신의 아이가 나라에 빚을 진 사람이 되길 바라는가, 나라가 빚을 진 사람이 되길 바라는가."
명문가를 만드는 건 '지식'이나 '돈',
'명예'가 아니라 '도덕적인 일상'에 있다. 부모와 자식이 함께 가진 전부를 투자하면 삶을 바꿀 수 있다. 명문가는 그런 일상이 쌓여 만들어진다. 그게 바로 이회영 선생이 남긴 소중한 가르침이다.
- <부모 인문학 수업>, 김종원
'1부 수신修身, 중심이 바로 선 기품 있는 아이' 중에서
이 글을 통해
이석영과 이회영이 백사 이항복의 후손이고, 서울에서 양평까지 이석영의 땅이 아닌 곳이 없을 정도의 대부호였는데 그 모든 재산을 처분해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6형제가 모두 20년 넘게 독립운동에 전재산과 일생을 바쳤음을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
이렇게 대단하신 집안을 우리는 왜 몰랐던 것일까?
그분들의 피와 땀 덕분에 오늘날 자유독립국가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국민으로서 심히 부끄러운 일이었다.
오늘 KBS 다큐멘터리에서는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만주로 망명한 6형제의 결기를 느낄 수 있다고 한다. 백사 이항복의 후예인 이들 가문은 300여 년 동안 9대에 걸쳐 정승을 배출한 삼한갑족의 명문가였다. 또한 남양주에서부터 서울 흥인지문까지 남의 땅을 밟지 않고도 왕래할 수 있어 남양주의 부호라 불린 귤산 이유원의 양자로 입적한 이석영이 양부로부터 물려받은 전 재산(현재 가치 약 2조원)을 독립 자금으로 내놓은 과정에서 남은 여러 자료들도 확인해볼 수 있다고 한다.
한편, 이번에 제작된 영상은 남양주시에서 추진한 사업으로 전 재산을 독립운동을 위해 희사한 남양주의 대표 역사 인물인 이석영 선생을 더욱 널리 알리는 기회이자, 일제잔재 청산과 독립운동사 교육자료로 활용될 예정이라고 한다.
오늘 저녁 3월 5일 저녁 8시 5분에
KBS1에서 하는 ‘독립 전쟁에 투자하다 이석영’ 꼭 봐야지!!!
* 이석영의 안타까운 죽음과 최근 밝혀진 직계후손
이석영의 재정적, 정신적 지원 아래 형제들은 삶의 터전을 세우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으며, 1920년 청산리 전투 승리를 비롯해 국군의 모태가 된 신흥무관학교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45년 광복을 맞았을 때 6형제 가운데 단 한 명인 성재 이시영만 살아남았다.
넷째 이회영은 궁핍한 생활 탓에 가족들과 생이별을 하면서도 독립운동에 전념하다 뤼순 감옥에서 순국했고, 다른 형제들 역시 독립운동을 이어나가다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됐다. 특히 둘째 이석영은 6형제 중 가장 많은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치고도 광복을 보지 못한 채 1934년 이역만리 망명지에서 굶어 죽고 만다.
독립운동 끝에 이역만리 망명지에서 쓸쓸히 삶을 마감한 것도 안타깝지만, 더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은 80 노구를 이끌고 상하이의 빈민가를 전전하며 두부찌꺼기인 콩비지로 연명하다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다.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라 눈물이 날 정도인데,
다행히 좋은 소식도 있다.
국가보훈처는 2월 23일 일제강점기 한국광복군의 초석인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독립운동가 이석영(1855-1934) 선생의 직계후손들을 찾았다고 밝혔다. 이석영 선생의 외손 10명이 국내와 대만에 살고 있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이번 후손 확인은 지난해 7월 <한겨레21>이 이석영 선생의 외증손녀이자 장남 이규준 선생의 외손녀라고 주장하는 최광희·김용애씨 등을 인터뷰하고 지난해 8월 이들이 독립유공자 유족 등록을 신청하면서 시작됐다. 이전까지는 이석영 선생 가족들이 일제에 몰살당해 직계 후손이 없다고 알려졌다. 이규준 선생의 세 딸이 이석영 집안의 족보와 국가의 가족관계 기록에서 빠진 것은 당시의 엄혹한 시대 상황과 이규준 선생의 안타까운 가족사 등이 작용했다.
이석영 선생의 아들인 이규준 선생이 30대 초반에 세상을 떠난 뒤 세 자매도 뿔뿔이 흩어져 그동안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다. 중국 일대를 떠돌았던 첫째와 둘째는 국내에 정착했으나, 막내 딸(이우숙)은 대만에 뿌리를 내렸다. 세 자매가 숨진 뒤 국내 자녀들도 ‘이석영의 후손’임을 드러내지 않았다
2021년 5월 처음 열린 이석영 선생 순국 87주기 추모식을 계기로 이석영 선생의 증손녀인 김용애(87)씨가 <한겨레21>과 인터뷰를 하고 유공자 신청에 나섰다. 당시 언론들이 “선생이 직계후손이 없어 그동안 장례를 치르지 못했다”고 추모식을 보도했기 때문이다. 김용애씨는 “저승에 가서 어머니(둘째 딸 이숙온)를 만나면 할 도리를 하고 왔다고 말씀드리고 싶었다”고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후손 확인은 쉽지 않았다. 이들이 직계 후손임을 알 수 있는 가족 사진들이 있었지만 가족 관계를 증명할 기록이나 공식 서류가 없었기 때문이다. 유공자 신청인의 제적부에 기재된 조부모 이름이 선생의 장남(이규준)과 일치하지 않아 후손 여부를 확인하기 어려웠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일제 탄압을 피해 가명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던 중 1967년 10월 14일치 한 국내 신문에 보도된 “조국의 혈연을 찾아달라”는 대만 거주 막내딸 이우숙씨 기사가 실마리가 됐다. 대만한인회와 주타이베이 대한민국대표부의 도움으로 이우숙씨의 대만 호적등기부에 아버지가 한자로 이규준이라고 적힌 사실을 확인했다. 이어 이우숙씨 후손과 이석영 선생의 외증손녀라고 주장하는 최광희·김용애씨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유전자 검사 결과 ‘동일 모계’임이 확인돼 이석영 선생의 후손으로 인정됐다. 보훈처는 확보한 자료와 유전자 검사 결과 등을 종합해 외부 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독립유공자 후손 확인위원회에 상정해 모두 10명을 후손으로 의결했다.
이석영 선생은 독립운동을 위해 1910년 이시영·이회영 등 6형제와 함께 만주로 망명해 청산리대첩 등 독립전쟁 주역을 배출하고 한국광복군의 초석이 된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는 등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당대의 손꼽히는 재산가인 이석영 선생은 집안의 전 재산을 처분해 6형제 가족들과 독립운동에 나섰다. 앞서 정부는 1991년 이석영 선생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장남 이규준 선생도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뒤 1920년 국내로 들어와 독립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중국에서 조직된 항일비밀운동단체에서 일제 밀정을 처단하는 일에 앞장서기도 했다. 정부는 이규준 선생에게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보훈처는 이날 “정부는 앞으로도 후손 찾기 작업을 통해 독립운동가들을 끝까지 기억하는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겨레신문 권혁철 기자의 글)
1929년 중국 상하이에서 있은 이석영 선생의 손녀(이온숙)의
결혼식 사진. 당시 주례자는 도산 안창호 선생(뒷줄 중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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