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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Apr 21. 2022

보석처럼 빛나는 보석사 천년 은행나무

금산 여행

죽은 듯 잠잠하던 나무에서 새순이 돋아나오며 세상이 연둣빛으로 물들어가는 봄입니다. 이런 봄날 아침 금산 보석사의 천년이 넘은 은행나무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 보러 갔어요.


주소 : 충남 금산군 남이면 석동리 산5 보석사

입장료와 주차료 없음.

일주문 앞에 주차장과 화장실 있음.


금산 보석사는 집과 가까워서 자주 찾는 곳이랍니다. 보석사라는 절 이름은 앞산에서 금을 캐어 불상을 주조한 데서 비롯했대요. 조구 대사가 885년(고려 헌강왕 11)에 절을 지을 당시 제자 5인과 더불어 육바라밀(六波羅蜜)을 상징하는 뜻에서 절 앞에 둥글게 은행나무 여섯 그루를 심은 것이 하나로 합해져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고 전한답니다. 보석사로 들어오는 길을 지나 왼쪽 진악산 기슭 아래쪽에 자리잡고 있어요.

 

보석사 일주문 앞에 주차를 하고 전나무가 쭉쭉 뻗은 오솔길을 따라 100m쯤 걷다보면, 왼쪽에 양팔을 벌린 자태로 우람하게 서있는 은행나무가 눈에 들어옵니다. 높이 40m, 가슴높이 줄기둘레 10.4m, 가지퍼짐은 동서쪽 28m, 남북쪽 29m이라 한눈에도 범상치 않은 나무임을 알 수 있어요. 특히 봄날 아침, 마알갛게 새얼굴로 나온 태양빛을 받은 은행나무는 마치 보석처럼 환하게 빛나더라구요~

보석사 은행나무는 1990년 8월 2일 천연기념물 제365호로 지정되었으며 수령은 올해로 1112년쯤 되었어요.(90년 천연기념물 지정당시 수령이 1080년)

오래된 은행나무는 대개 주축을 상실하는데 이 나무는 주축이 뚜렷이 살아 있다는 것이 특징이에요. 줄기가 굵고 세로 방향으로 골이 졌으며, 뿌리목 부근에서 수많은 움싹이 돋아나 그 높이가 2∼3m에 이른답니다.


마을을 지켜주는 신목(神木)으로 나라와 마을에 재난이 닥치면 우는 소리를 내서 미리 알려준다는 전설이 있어요. 실제로 1945년 광복, 1950년 한국전쟁, 10.26 사태, 5.18 광주항쟁, 1992년 극심한 가뭄 때 나무가 큰 소리를 내며 운 적이 있다고 합니다.


보석사 은행나무는 ​암나무라서 가을에 은행열매가 떨어질 때쯤 가시게 되면 면적 1,122㎡ 근처에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요.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은행열매가 지천이라 밟았다 하면 한참동안 구린내가 따라다니거든요. 2년 전 가을, 차에 관한한 엄청 깔끔을 떠는 남편이 "은행나무 구역 안에 들어가면 차에 안 태워준다!"고 협박을 했는데도, 나무 가까이 가서 사진을 찍다가 결국 은행을 밟고는 보석사 앞 개울에서 신발밑창을 빡빡 닦고서야 겨우 차를 탈 수 있었답니다^^;

그래서 은행열매 밟을 걱정 없는 봄에는 실컷 나무 주위를 살필 수 있으니, 요맘때 한 번 들러보시길 추천합니다.


은행나무만 보고 나오면 좀 섭하지요?

은행나무 앞의 보석사도 작은 도량이라

아담해서 한 번 둘러보고 나오기 좋답니다.

보석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로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조구가 창건한 사찰이에요. 자세한 역사는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고종 때 명성황후가 중창하여 원당(願堂)으로 삼았으며, 1912년부터는 31본산의 하나로서, 전라북도 일원의 33개 말사를 통괄하였다고 해요.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진영각·심검당·산신각·응향각·체실·요사채가 있어요.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다포집 맞배지붕이며, 법당 내부에는 석가모니불·관세음보살·문수보살의 좌상을 모셨는데, 조각수법이 정교하고 섬세하며, 상호가 원만하고 자비로워 조선시대 불상 중에서는 극치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해요. 또 진영각은 휴정·유정·영규의 영정을 모셨던 곳인데 안타깝게도 최근에 영정을 도난당했다네요.

이 절의 입구에 있는 높이 4m의 '의병승장비(義兵僧將碑)'는 공주의 청련암과 보석사에서 무예를 익힌 뒤 임진왜란 때 왜병과 싸우다가 전사한 승병장 영규의 순절비로, 1839년 5월에 금산 군수가 세운 것이라고 해요. 영규가 순국한 내용을 적은 이 비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에 의해서 자획이 뭉개지고 땅에 묻혔던 것을 1945년 정요신이 찾아서 다시 세운 아픈 역사가 있기도 하답니다.


주차장 앞의 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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