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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Nov 30. 2022

11월 마지막 날의 선물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

♡ 향기로운 짐 ♡

문해력수업으로 3주,
홈커밍데이 행사로 1주.
 
코로나 이후 3년만에 서울나들이를 하면서 이틀 밤씩이나 신세를 진 곳이 있으니 바로 작은댁이었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첫 해부터 결혼해서 독립해나가던 해까지 7년을 함께 살았던 친척집. 서울을 제 2의 고향으로 느끼게끔 해주고, 친정이 먼 나에게 부모님보다 더 자주 찾아뵈었던 작은엄마 작은아빠가 계신 곳.

지금은 비교적 흔해졌지만 80년대 중반에는 국제결혼을 하는 경우가 많지 않던 때에 용감하게 국제결혼을 하신 작은아빠 덕분에 난 일본인 작은엄마를 만나게 되었다.

중학졸업반이던 설날,
식구들의 초미의 관심사를 받으며 등장한 작은엄마는 일본에서 교사를 하셨던 분답게 지성미가 넘치셨는데(그때만 해도 우리집안에서 유일하게 대졸 며느리였음) 하얗고 작은 얼굴에 커다란 눈, 선한 인상의 어여쁜 분이셨다.

한국말이 서툴러서 집안 어른들의 짖궂은 농담에도 그저 웃기만 하시던 작은엄마의 첫인상은 참 좋았다. 그 뒤로도 작은엄마는 1년에 많이 봐야 한두 번이었지만 그때마다 한국에서 일본어강사와 잡다한 아르바이트로 버신 돈으로 조카들에게 줄 선물을 아낌없이 준비해서 건네시곤 했다.   

그래서 내가 대학을 서울로 가게 되자, 작은집에서 지내며 외국인인 작은엄마는 살림할 줄 모르니 니가 작은집 살림을 도맡아서 하라는 부모님의 엄명을 받았을 때 당연한 거라고 여겼고, 흔쾌히 받아들였다.

내가 서울로 짐싸들고 유학왔을 당시,
작은엄마는 결혼 3년만에 첫째를 임신하고 계셨더랬다. 산달은 5월. 그러니까 난 작은집의 살림과 더불어 작은엄마의 산후조리, 아기 돌봄, 병원일 보시는 것까지 도우며 학교를 다녀야했다.

종합서비스직이었던 그 일은 유난히 부부애가 돈독하셨던 작은아빠와 작은엄마께서 사랑의 결실로 줄줄이 아이 넷을 낳으신 덕분에 내가 결혼하기 전까지 7년동안 쭈욱 이어졌다.

고등학생 시절 자취생활을 1년 반 정도 하긴 했으나 공부가 주업무였던 나에겐 사실 인고의 시간이기도 했지만, 두 분이 워낙 잘해주셔서 좋은 추억도 많았다. 그래서 결혼 뒤에 서울 살 땐 자주 찾아뵀고, 대전 내려가 살면서도 시댁이 서울이라 명절 때면 꼬박꼬박 인사드리러 가곤 했다. 친정인 해남이 멀어서 못가는 대신 서울 작은집을 친정처럼 다닌 셈이다.

그러나 어머님께서 대전으로 내려오시며 합가하면서부터는 서울에 올라갈 일이 줄어드니, 자주 뵙지 못하고 전화통화나 종종 하며 17년 세월을 보냈다. 그럼에도 이번에 아들이랑 같이 서울에 교육받으러 간다고 하니, 우리집에 와서 자라며 먼저 말씀해주신 작은엄마 덕분에 작은집에서 편하게 하룻밤을 보냈다.

지난 주 학교행사 때는 되도록 당일치기로 다녀오려고 했으나, 행사 끝나는 시각이 8시고, 10년만에 동기들 만나는 거라 간만에 술 한잔씩 하기로 한 탓에 내려갈 시간을 여유있게 잡으려고 보니 기차는 이미 매진이고, 버스는 늦은 시간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작은엄마께 하룻밤 묵어도 되냐고 여쭈니, 바로 그러라고 해주셔서 기쁜 마음으로 짐을 챙겨서 서울에 올라갔다.

이번에 서울 가면 이제 내년에나 올라갈 일이 생길 것 같아서 올라간김에 쇼핑을 좀 해야겠다 생각하고 강남고속터미널로 갔다. 지하철역 나오자마자 노브랜드가 보이길래 커피 한 캔 사려고 들어갔는데, 계산대에서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계신 손님을 봤다. 꽃이 참 예뻐서 어디서 사셨나 물으니, 터미널 3층에 꽃시장이 있는데 11시 반이 마감이라는 거였다. 시계를 보니 11시 22분!

마감까지 8분이 남은 상황이라 부랴부랴 계산을 마치고 허겁지겁 3층으로 올라갔다. 감성 풍부하신 작은엄마께서는 분명 꽃을 좋아하실 거라, 싱싱한 꽃을 사들고 가야겠다 싶어서.

올라가보니, 생화 마감시간이 12시였다.
노브랜드에서 만난 그분이 잘못 알고 있었던 덕분에 좀 뛰긴 했어도 여유롭게 돌아보며 꽃을 고를 수 있었다. 꽃이 예쁜 게 정말 많아서 고민고민끝에 연분홍빛이랑 진붉은빛 장미 두 단을 골랐더니, 신문지에 둘둘 말아서 줬다. 여긴 다 그렇게 최소한의 포장으로 꽃을 판매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커다란 장미 두 다발을 들고, 신세계백화점으로 고투몰로 다니며 쇼핑을 마친 뒤 지하철을 타게 됐는데... 짐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바닥에 내려놓을 짐은 내려놓고, 꽃다발은 든 채로 가다보니 중간에 자리가 났는데, 내가 앉기보다 짐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서있는 게 낫겠다 싶어서 의자에 짐만 내려두었다. 꽃다발은 어디 놓기도 애매해서 계속 들고 있었다. 그때 다음 역에서 타신 아주머니가 빈 자리를 찾아 내 앞까지 오시더니만

"괜찮으시면 제가 이 자리에 앉고 짐을 대신 들어도 될까요?"

하신다.

"네~ 그러세요. 짐이 많아서 민폐네요~^^;"

하니까,
짐을 치우고 자리에 앉으시며

"그것도 저 주세요. 제가 들고 있을게요."
 
하시면서 내가 들고 있던 꽃다발을 냉큼 가져주셨다.

"어머~ 향기로운 짐이네요!"

신문지 안에 돌돌 싸인 꽃을 보시더니 감탄사 연발!

'와~ 향기로운 짐이라니!
이 분 참 말씀을 곱게도 하시네~'

센스쟁이 아주머니 덕분에 기분좋게 웃으며 목적지에 도착해 작은집까지 무사히 꽃다발을 가져갈 수 있었다.

점심약속이 있어서 나가신 작은엄마는 내가 짐 풀어두고 학교에 간 뒤에야 오셨는데,
꽃다발을 보시더니 환호성을 지르셨다고 한다.(사촌동생의 전언)

그 꽃을 보시고,
작은엄마께서 나에게 보내신 톡.

"00아♡♡♡
이렇게 예쁘고 많은 장미꽃을 받는 것 난생처음이야~
너무너무 고맙고 감동받았어ㅠㅠ
추우니까 어서 돌아와♡♡"

동기들과의 술자리가 끝나고 자정 다 되서 들어오니, 그때까지 기다리신  작은엄마랑 한 이부자리에 나란히 누워 도란도란 이야기하다 잠이 들었다.

7시 전에 출발하는 버스 타고 내려가느라, 새벽 5시 반부터 준비해서 나와 지하철역으로 가는데 작은엄마께서 지하철역까지 배웅을 해주셨다.
 
대전에 내려온 뒤,
작은엄마께서 톡을 하나 더 보내주셨다.

임시방편으로 페트병에 물을 담아 장미를 꽂아두신 사진과 함께...

"두고두고 본다.
00아~고맙다~♡♡"

다음에는 아무래도 예쁜 꽃병을 선물해드려야겠다.

11월의 마지막날이자 수요일인 오늘,
사랑하는 가족에게 또는 연인이나 지인에게 향긋한 장미로 마음을 전하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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