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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Jan 18. 2023

신영복 교수님 7주기에

신영복과 데모크리토스

고 신영복 선생님 7주기 추모제가

2023년 1월 16일(월) 오전 11시 성공회대 추모공원에서 있었다. 그곳엔 가지 못했지만 7년 전 장례식에 참석했던 기억이 떠올라 신영복 교수님을 기리며 글을 써본다.


<  처음처럼 >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고 일어서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저녁 무렵에도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다시 새 날을 시작하고 있다.


- 신영복


오늘 새벽 한 단톡방에 올라온 시를 보고 필사한 글이다. 처음엔 신영복 교수님이 이런 시도 지으셨구나~ 했더랬는데, 생각해보니 시가 아니라 평소 짧은 글과 그림으로 표현하시곤 했던 유명한 글이었다. 자주 접했던 글도 이렇게 행을 나누어 시의 형식으로 쓰니 아주 낯설게 다가왔던 것이다.



이틀 전인 1월 16일,

과거의 오늘로 7년 전 글이 떴는데,

바로 신영복 교수님 타계 소식이었다.

 

[2016년 1월 15일 밤 10시10분께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가 별세했다. 향년 75세.]


여기서 신영복 교수님을 잘 모르는 분들을 위해 잠깐 소개를 하자면~


신영복(申榮福, 1941년 8월 23일 ~ 2016년 1월 15일)은 대한민국의 사상가이자 작가이며 대학교수로 활동하셨던 분이다. 경제학자로 활동해온 신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과·대학원을 졸업한 뒤 육군사관학교에서 경제학 교관으로 복무하던 중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 시절인 1968년 이른바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돼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모두 20년 20일을 복역한 신 교수는 민주화 이후인 1988년 광복절 특별 가석방으로 출소했다.


이후 1989년부터 성공회대에서 강의를 해왔으며, 20년 넘는 수감 생활에서 겪은 서신·이야기 등을 담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1990년 출간해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2006년 성공회대에서 정년퇴임을 한 후에도 석좌교수로 활동하며 꾸준히 강단에 올랐으나, 2014년 희귀 피부암 진단을 받아 그해 겨울학기에 마지막 강의를 했다. 이듬해인 2015년 그의 강의 녹취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마지막 책 《담론-신영복의 마지막 강의》가 출간됐다. 대표작으로 《나무야 나무야》(1996), 《더불어 숲》(1998), 《강의-나의 동양 고전 독법》(2004) 등이 있다.  


교수님은 2014년 진단 받은 희귀 피부암으로 투병 생활을 해오시다, 암이 다른 장기로 전이되면서 끝내 2016년 1월 15일 세상을 떠나셨다. 장례식은 성공회대에서 학교장으로 치러졌으며, 유족은 부인 유영순(68)씨와 아들 지용(26)씨였다.


교수님 부고 듣고 바로 채비해서 아침 기차를 타고 성공회대 장례식장에 갔던 난 상주를 맡아 자리를 지키는 지용씨를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는데, 나이를 몰랐던 당시엔 지용씨가 워낙 동안이라 10대처럼 보여서 더욱 마음이 쓰였더랬다. 저 어린 아들을 두고, 더이상 버틸 수 없는 때문에 세상을 떠나셔야 했던 교수님의 부모로서의 안타까움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교수님 가신 지도 어느덧 7년 세월이 흘렀다.

어떤 칼럼을 보니 교수님은 돌아가시기 전 서서히 곡기를 끊으시고 죽음을 기다리셨다고 한다. 생명유지장치에 기대어 무의미한 삶을 연명하기보다 존엄한 인간으로서 죽기를 바라셨기 때문이다.


이 기사를 본 순간 문득

2500여년 전의 그리스 철학자 데모크리토스가 떠올랐다. 기원전 460~370년동안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웃음의 철인'이자 원자론을 정립하고 유물론 형성에 영향을 끼쳤으며, 당대의 플라톤과 어깨를 겨뤘던 그리스 철학자 데모크리토스.

(플라톤은 자신의 관념론과 대비되는 유물론을 주장하는 데모크리토스를 몹시 미워해 그의 책들을 쌓아놓고 불지르고는 제자들에게 절대 그의 책은 읽지도 보지도 말라고 경고했다고 한다)


그리스의 고대 철학과 근동의 사상이 모여든 그리스 북동부 트라케 연안의 압데라(Abdera)에서 태어난 데모크리토스는 여행을 좋아해서 큰 부자였던 부모님이 물려준 재산을 이집트, 페르시아, 인도 등지를 여행하느라 탕진해서 가난해졌다고 한다. 그는 당시의 법에 따라 재산을 탕진한 죄로 재판정에 불려나가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재판정에서 자신이 여행하면서 보고 듣고 배운 것들을 낱낱이 진술하자 재판관은 "그는 유산을 탕진한 게 아니라 마르지 않는 지식으로 바꾸었다"며 무죄 방면을 선고했다고 한다.


그 뒤로 그는 미래의 일을 예언함으로써 명성을 얻었고, 자신의 책 《대우주 체계》를 사람들에게 낭독해주고 어마무시한 돈을 벌게 된다. 그의 명성은 널리 퍼졌으며, 심지어 생전에 청동상까지 세워졌다고 한다. 백세 넘게 장수하다가 죽을 때는 국가에서 장례를 치뤄줬는데, 그가 죽은 방식이 아주 인상적이다.


그는 너무 연로해서 임종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이제 100세가 넘게 살았으니 죽을 때가 되었다며 곡기를 끓고 스스로 죽음을 맞이하려던 참에 함께 살던 누이가 간곡하게 부탁을 했다.  그의 누이는 테스모포로스 축제에 참석해 그녀가 여신에게 해야 할 마땅한 의무를 행해야 하는데, 축제 동안 오빠가 죽으면 그 의무를 다하지 못할 것이 걱정됐던 것이다. 누이는 오빠에게 자긴 축제에 꼭 참석하고 싶은데 오빠가 죽으면 못 가니까, 죽는 걸 미뤄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데모크리토스는 누이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는 자신에게 따뜻한 빵을 매일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고, 그는 이 빵을 코에 대고 빵냄새를 맡으며 축제 기간 동안 살아 있었다. 드디어 축제가 끝난 뒤, 이제 죽어도 되냐고 누이게에 물은 뒤 누이의 오케이 사인을 받고는 3일이 지나서 아무런 고통 없이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이때 그의 나이 109세였다.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며 고통 속에 살면서도 사색의 힘으로 그 시간들을 견뎌내고 세상에 나오셨으나 다시금  고통스런 병으로 돌아가신 신영복 교수님과 평생을 여유롭게 살며 늘상 웃으며 살았던 데모크리토스의 삶은 얼핏 보기엔 접점이 하나도 없어보인다. 그러나 죽음을 대하는 태도에서 두 분의 지향점이 같았던 것을 보면 역시 위대한 분은 다르구나~ 싶어진다. 살아있는 동안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죽음 앞에서도 담대하고 의연하셨던 게 아닐까.


작년 말에 읽었던 책 [죽음이 물었다]에서도 깨달은 바이지만 살아있는동안 잘 살아야겠다. 오늘 필사한 신영복 교수님의 '처음처럼'에 나온 글귀처럼 하루가 저무는 저녁에도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다시 새 날을 시작할 것이다.



https://brunch.co.kr/@malgmi73/5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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