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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Jan 31. 2023

나를 가치있게 만드는 방법

제가 해보니 나름 할 만합니다


김영우 작가의 <제가 해보니 나름 할 만합니다>는 40대에 시작한 전원생활, 독립서점, 가사노동, 채식을 다룬 수필집이다. 이런 일들을 해보니 나름 할 만하다는 뜻으로 지은 제목이 아닌가 싶다.


작가는 기업의 연감을 만드는 일이 주업이고, 가평에서 '북유럽'이라는 책방을 운영하며, 때때로 강의를 나가거나, 원고를 써서 보내는 일이 부업인 요즘말로 N잡러이기도 하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 잡지로 시작해, 사보나 기업 간행물 을 두루 거쳐 지금은 기업의 사사(史)를 쓰며 23년동안 글을 써서 먹고 살았으나 이제야 첫 책을 내게 됐다는 작가는 "원고 쓴다"는 말만 입에 달고 살 뿐 실체가 없어서 초등학생 시절 내내 아빠의 직업을 의심했던 딸에게 작은 결과물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 벅차다고 한다. 딸에게 인정받는 아빠가 되신 것을 축하한다^^


작가는 이 책에 들어갈 글을 쓰다가 타인을 서슴없이 대상화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면서 무능과 무지와 부족함을 절감했다고 한다. 수차례 목차를 갈아엎고 새로 쓰고 수정을 반복하면서, 이 책이 어떤 모습을 갖추든, 다만 아무에게도 상처 주지 않는 글로 채워지길 바랐고 그렇게 읽히길 희망한다고 프롤로그에서 밝힌다. 어쩐지 이 책을 읽는 동안 작가가 참 여러모로 심사숙고하며 썼구나~ 하는 게 느껴지더라니. 글이 매끄럽게 잘 읽히는 건 단지 글을 잘 써서만이 아니라, 글 속에 담긴 생각들을 몇 번이고 고쳐쓰면서 누구에게도 상처주지 않고자 하는 작가의 노력이 컸던 탓이다.


작가 김영우는 서울의 어느 평범한 가정에서 남자로 나고 자랐다.(그러나 내가 책속에서 접한 그의 성장사는 그렇게 평범해보이지 않았다) 평범과 평균, 간혹은 그 이하를 오가며 한마디로 평생 비주류, 2군, 무명씨였다고 생각했던 그는 가부장제만큼은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너무나 편하고 안전하게 살아 왔음을 뒤늦게 깨닫고는 당혹감과 부끄러움과 억울함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왜 그가 그렇게 느껴야 했는지는 책을 읽고 알아내시길 당부한다. 254쪽의 적당한 분량이고, 어디나 들고 다니기 편하게 한 손에 쏘옥 들어오는 책이다. 무엇보다 읽는 내내, 재밌게 읽히면서도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내용들이 이어진다.   


이 책의 내용 대부분은 아내에게 빚진 거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는 그의 책 속에서 나의 마음에 유난히 남은 구절은 바로 다음에 소개하는 내용의 마지막 문장이다.




나를 조금이나마 가치 있게 만드는 방법은 누군가의 믿음을 배반하지 않는거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싶었다.




나도 이 사실을 기억하고 싶다.




돌아보니 상한 이유식을 먹으며 미소 짓던 딸아이의 표정과 헤매던 끝에 나를 보고 반갑게 손을 흔들던 아내의 얼굴은 하나였다. 나의 어떤 행동과 말에도 아무런 의심조차 하지 않던, 나를 향한 무조건적인 믿음을 드러내고 있던 얼굴들. 덕분에 나를 부끄럽고 미안하게 만들었던 얼굴들. 둘이지만 하나였던 그들의 미소를, 나는 '절대 신뢰'라는 단어로 간직한다.

그때의 사소한 일들이 문득문득 떠오르곤 한다. 나를 휘청거리게 한 거대한 풍파만큼 의미가 담긴 사건이었다. 삶은 소비하지 않아도 어차피 소모된다. 그래서 삶의 관건은 어떻게 소비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닐까. 나를 조금이나마 가치 있게 만드는 방법은 누군가의 믿음을 배반하지 않는거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싶었다.


- 제가 해보니 나름 할 만합니다, 120~1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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