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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Jan 20. 2023

어머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첫째가 성년이 되고부터 꿈꾸던 독립을 드디어 하게 됐다. 대학을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갔더라면 2년 전에 했어야 할 독립이 뒤늦게 이뤄진 것이다. 내가 일할 공간도 겸해서 집을 얻는 거라 본가에서 걸어 10분 안쪽의 거리에 있는 곳이다.


그런데도 따로 살림을 나는 거라, 고추장 된장 수건 세숫대야부터 냉장고 세탁기 전자렌지까지 모두 갖추어야 해서 마치 딸 시집 보내듯 살림을 준비하게 됐다.


집을 계약한 두 달 전부터 냉장고, 세탁기 예약하고(처음엔 중고로 마련해볼까 했는데 중고물건이 마땅찮기도 했고, 당근거래는 물건을 가져와서 이사 때까지 보관하는 문제와 오래된 가전은 전기를 많이 먹는다는 경험에 의거 "한 번 사면 적어도 10년은 쓸 테니 좋은 걸로 사자!" 하고 결론이 났다)  전자렌지랑 이불 주문하고 필요한 물건들을 하나 둘 갖춰나가기 시작했다.


드디어 이삿날인 1월 18일!

잔금 치르고 입주청소 끝난 뒤 오후부터 짐 나르기 시작. 책상 식탁 책장 화장대 서랍장 침대 등 덩치가 큰 건 아는 분 트럭을 빌려서 옮기기로 해 그분 시간여유가 나시는 설 이틀 뒤로 날을 잡았기에 내 차로 옮길 수 있는 자자분한 짐들 먼저 옮기게 됐다.


첫날은 그날 당장 자는 데 필요한 이불을 비롯한 세면도구와 옷들, 먹을 것들 위주로 옮겼다. 사이사이 도시가스도 연결하고, 인터넷도 설치하느라 정신이 오락가락할만큼 바빴다.  


그날 밤에 딸이랑 나란히 새집에 누워 곰곰 따져보니, 이사한다고 우리집과 딸집을 무려 다섯 번이나 왕복했다. 걸어서 세 번, 차로 두 번. 아침 9시 넘어부터 자정 무렵까지.


'와~ 이렇게 일주일만 살면 살 확 빠지겠는 걸!'

하는 일정이었다.


그러나 둘째 날에는 요령이 생겨서 아침 9시 전에 냉장고랑 세탁기 들어온다고 해서 한 번, 오후에 짐 나르느라 한 번 이렇게 딱 두 번만 다녀왔다. 아싸~(살 빼려면 이런 잔머리는 안 굴려도 되는디)


내가 챙겨줘야 하는 물건 외에는 딸이 직접 물건을 챙기다보니, 첫날 쓰려고 딸이 세면도구로 챙긴 샴푸 린스 바디워시가 여행용이란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집에 큰 것도 많이 있는데 어디 있는 줄 몰라서 여행용으로 가져갔나보다. 둘째 날 챙겨주려고 했는데, 어머님께서 외출했다 들어오시더니 가방에 뭘 잔뜩 무겁게 넣어가지고 오셨다.


"몸도 잘 가누시지 못하면서 가방에다 뭘 그리 무겁게 넣어 오셨어요?"했더니,


"나 쓰던 샴푸가 떨어졌길래 사러 갔다가 생각나서, 다래 쓰라고 마트에서 사왔니라."


하시며 주섬주섬 꺼내시는데 놀라버렸다!


용량도 무지 큰 샴푸, 린스에 바디워시와 바디로션까지~ 하나도 무거운데 무려 네 개씩이나. 게다가 어머님 쓰실 샴푸 린스까지 하면 대체 몇 키로야?


좋은 걸로만 골랐다고 하시며,

마트에서 사서 오는 길에 다래 사는 집 근처를 지나치게 되어 전화해서 내려오라고 할까 하다가 혹시 안 좋아할까 봐 그냥 집까지 낑낑대며 그 무거운 것들을 지고 오셨다는 것이다. 그냥 전화하시지~ 다래가 좋아했을 텐데...


이번에 다래 짐 쌀 때도 부엌살림 챙기는 건 어머님께서 많이 도와주셨다. 수저세트 그릇세트 좋은 걸로 꺼내서

미리 준비했다가 주시고, 고추장 된장 식초 간장 같은 양념거리도 어머님 선에서 해결이 되었다. 그렇게 엄마인 나보다 손녀의 이삿짐을 챙겨주시고도, 정작 손녀가 따로 나가 사는 집앞을 지나가시면서 손녀의 기분을 살피느라 그냥 오셨다니 참...


우리 어머님이 원래 이런 분이시다.

한참 손아래 사람이라 해도 그 사람의 기분부터 살피고 챙겨주시는. 이런 분이셨으니 내가 17년을 모시고 살았지. 한동안 어머님 마음이 변하신 것 같아 예전처럼 대하기가 어려웠는데, 이번 일을 접하고 다시 내 마음을 정비해보려 한다.  


결혼한 해부터 따지면 25년, 한집살이 18년째인 올해부터 심기일전해서 어머님 마음 깊이 헤아리며 잘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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