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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Mar 24. 2023

순천 낙안읍성 구경하실래요?

봄이 완연히 무르익은 3월 한가운데 예스런 분위기에서 꽃놀이하기 좋은 낙안읍성을 다녀왔다. 남도에서도 아래쪽인 순천은 지금 매화, 목련, 살구꽃, 수선화, 벚꽃까지 한창 봄꽃들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다. 볼거리 즐길거리 가득한 순천 낙안읍성으로 들어가 보자!



주차료 무료, 입장료 어른 4천원/ 청소년 군인 2500원 / 어린이 1500원 (할인관련 내용은 아래 표 참고)



순천 낙안읍성은 사적 제302호로 조선시대 전기부터 600여 년의 역사를 오롯이 간직하고 있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계획도시이다. 성곽, 동헌, 객사, 옥사, 낙민루, 중요민속자료와 같은 다양한 문화재와 소리의 고장으로서 오태석/송만갑 명창의 생가, 가야금병창, 판소리 등 유무형의 자원이 잘 보존되어 있다. 총 13점의 문화재(국가지정 10, 도지정 3)를 보유하고 있으며, 읍성내에 98세대 228명의 주민이 직접 거주하고 있어 생생하게 살아있는 민속마을이다.


낙안읍성은 현존하는 조선시대의 읍성들 가운데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곳으로 특히 성 안에는 전통적인 가옥들이 그대로 남아있으며 실제 주민들이 생활하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201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된 경주 양동마을과 안동 하회마을도 주민들이 생활하고 있지만 대부분이 기와집이고 문을 꼭 그러잠그고 있어 안쪽을 살피기 어려운 데 반해 낙안읍성은 초가집에 담장이 낮아서 사립문을 닫고 있어도 밖에서도 어느 정도 보이는 데다, 민박을 하는 집도 많고 체험을 위해 문을 활짝 열어둔 집들이 많아 내부도 찬찬히 구경할 수 있다는 점이 좋다.


낙안의 역사는 꽤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한시대엔 마한, 삼국시대엔 파지성, 고려말 이후부터는 낙안군 지역 으로 남아 있다가, 1908년 10월 15일 낙안군이 폐지되면서 순천군에 편입 되었으며, 1995년 1월 1일 시군 통합에 의하여 순천시와 승주군이 통합 되어 현재는 순천시 낙안면이 되었다.


낙안읍성을 빙 둘러싼 성곽은 조선 태조 6년(1397) 낙안출신, 전라도 수군도절제사 양혜공 김빈길 장군이 왜구의 침입에 맞서기 위해 흙으로 쌓은 것이 처음이다. 세종 6년(1424) 되던 해부터 석성으로 쌓기 시작했으며, 전체가 석성으로 중수된 것은 그로부터 약 200년 후인 1626년 충민공 임경업 장군이 낙안군수로 부임한 이후라고 한다.


임경업(1594~1646)은 조선시대 중기의 명장으로, 인조 4년(1626) 이곳 전라도 낙안지역의 군수로 부임해왔다. 인조 6년(1628) 3월 내직으로 옮겨갈 때까지 낙안읍성을 쌓는 등 어진 다스림을 베풀었으며, 병자호란과 정묘호란 때에도 큰 공을 세웠다. 군수 임경업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성 중심부에는 임경업장군비각과 비(碑)가 마련되어 있다. 이 곳에서는 임경업 장군을 신봉하여 매년 정월 보름이면 낙안면 주민들에 의해 큰 제례가 이어지고 있다.


읍성 전체 모양은 장방형인데 배를 닮았다고 하여 풍수지리에서는 행주형이라고 한다. 그 까닭으로 마을 샘도 깊이 파지 않았다는데 구멍이 뚫리면 배가 침몰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을의 전체 면적은 223,108㎡이고, 동·서·남쪽 3곳에는 성안의 큰 도로와 서로 연결된 문이 있고(동·서·남문의 이름은 낙풍루·낙추문·쌍청루), 4군데의 치성이 있어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선조들의 우수한 지혜를 엿볼 수 있다. 낙안읍성을 빙 둘러싼 높이 4~5m 길이 1,410m의 성곽길을 따라 걸으며 마을을 위에서 조망하는 풍경이 정말 좋으니 넉넉하게 시간을 잡고 천천히 걸어보시길 추천한다. 성곽길 중간중간 마을로 내려갈 수 있는 돌계단이 이어져있어 둘러보다 눈길 멈추는 곳이 있으면 내려가서 좀더 자세히 볼 수 있다.


다만 서문에서 남문사이 대나무밭 있는 곳 '전망 좋은 곳'은 풍경은 정말 멋지지만 지대가 꽤 높은데도 난간 같은 게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아 위험하니 안전문제에 유의하셔야 한다. 성곽길 중간중간 비스듬하게 경사가 진 곳도 있는데 전혀 안전장치가 없어 노약자는 걸을 때 특히 조심하시길 당부한다. 미관상의 이유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선지 '추락주의' 돌표지석만 설치된 점이 아쉬웠다.  


성 안에는 90여 가구의 민가가 있는데 실제로 주민이 거주하고 있어 그 가치를 더하고 있으며, 보통 1가구당 2~3채의 초가집과 마당, 텃밭으로 구성되었다. 초가집은 3칸 정도의 일자형 안채와 아래채, 그리고 농기구 등을 보관하거나 외양간으로 겸용하는 헛간채와 재래변소로 이용하는 잿간으로 이루어졌다. 동헌 객사 등 관아 건물들이 있는 북쪽에는 그네, 투호, 굴렁쇠, 고리던지기 등을 할 수 있는 넓은 놀이마당이 있고, 서문에서 남문 사이에는 대장금세트장과 짚물공예, 놋그릇 닦기,길쌈, 천연염색, 전통혼례, 국악, 유서, 도예, 소원지 쓰기 등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는 시설들이 마련되어 있어 아이들과 함께 즐기기에 아주 좋다.


수양버들의 연초록 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며 멋진 풍경을 연출하는 큰샘빨래터, 빙글빙글 돌아가며 절구를 찧는 물레방아와 모형소가 매어진 연자방아, 하얀 목화솜이 벙그러진 목화밭, 풀무질해서 달궈진 쇠를 땅땅 뚜드려대는 대장간, 금계 청계 황금계 백한 백봉오골계 공작 등 희귀한 조류가 있는 동물체험장, 두부체험장, 가야금병창체험장, 낙민관자료전시관(왠일인지 문이 잠겨있어 들어가보진 못했음) 등도 볼만한 곳들이다.

특히 낙안읍성에는 마을의 연륜만큼이나 오래된 노거수들이 32그루가 있는데, 그 중 13그루가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어 읍성의 역사를 지켜보고 있다. 한자리에서 이렇게나 많은 노거수를 볼 수 있는 곳이 흔치 않아 성안을 거닐다가, 성곽길을 따라 걷다가 노거수가 보이면 냉큼 달려가 경탄의 눈길로 바라보곤 했다. 놀이마당 뒤쪽 성벽을 따라서 10그루 정도의 노거수가 있는데, 200년 된 개서어나무, 300년 된 팽나무,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승전을 기원하며 심었다는 400년 된 푸조나무 등이 있다.

낙민루 앞 구정뜰엔 400년 된 느티나무 두 그루가 사이좋게 마을을 지키고 있고, 마을 중심부에는 행주형 마을지형에서 배의 돛대에 해당되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다.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낙안에서 의병과 군량미를 모아 좌수영으로 돌아가기 위해 이 은행나무 아래를 지나가고 있을 때 마차 바퀴가 빠져 잠시 멈춰 마차를 수리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덕분에 무너진 다리를 건널 뻔한 횡액을 면하게 해준 600년 된 은행나무이다(아래 자세한 내용 소개). 동문 근처 홍매화정원에서 두부체험장으로 가는 쪽에는 젖기둥 모양의 아래로 돌출한 독특한 가지들이 있는 600년 수령의 유주은행나무가 있으니, 놓치지 마시고 꼭 찾아보시길.

동문에서 서문을 일직선으로 관통하는 마을 안길 중간쯤에는 식사와 간식을 해결할 수 있는 난전들과 카페, 마을상점들이 있으니 낙안읍성 구경하시다 출출해지면 그곳을 이용해 빈속과 궁금한 입을 달래도 좋겠다.

주말 11시~12시/ 15시~16시에는 판소리, 기예무단, 기악, 가야금, 사물놀이와 같은 상설공연이 있다. 매년 정월대보름 축제, 전국 국악대전(4월중), 가야금 병창 경연 대회(5월중), 낙안읍성 민속문화 축제(10월중)와 같은 행사도 있으니 참고하셔서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거리 가득한 순천 낙안읍성에서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란다. 한 번 찾은 사람은 낙안읍성의 매력에 빠져 다시 찾게 된다고 하는데, 나역시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찾고픈 곳이었다.

* 마을 중심의 은행나무에 얽힌 이야기

높이 30m, 줄기둘레 약 8m가 되는 이 은행나무는 읍성 안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나무이다. 기록에는 조선 인조4년(1826년) 임경업 장군이 토성을 석성으로 중수한 이후로 수령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조선 태조 8년(1397)에 왜구가 침입하자 이 고장 출신 김빈길 장군이 의병을 일으켜 토성을 쌓았다는 것을 보면 은행나무의 수령은 훨씬 오래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후 병사가 턱없이 부족하여 전라좌수영 관내에서 의병을 모집하던 중 마침 낙안에 지원자가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장군이 직접 낙안으로 왔다. 인구가 많은 고을인데다 예로부터 우국지사가 많은 곳이라 의병이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의병으로 나서지 못하는 주민들은 군량미를 내놓기도 하고 무기를 만들라고 농기구를 내놓기도 하였다.

이후, 의병과 군량미를 모아 좌수영으로 돌아가기 위해 읍성 안에 있는 이 은행나무 아래를 지나가고 있을 때, 마차 바퀴가 빠져 잠시 멈춰 마차를 수리하고 다시 서둘러 좌수영으로 길을 떠났다. 그런데 낙안에서 순천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커다란 다리가 하나 있는데 하필 다리가 무너져 있어 근처에 있던 주민에게 물어보니 조금 전에 갑자기 광풍이 일더니 다리가 무너져 내렸다고 하는 것이다.

시각을 따져보던 장군과 부장들은 순간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조금 전에 만약 마차가 고장 나지 않았더라면 군량미는 물론 장군이나 병사들의 생명조차 위험하였기 때문이다. 모두들 낙안읍성의 은행나무 목신(神)이 장군을 위해 조화를 부린 것이라 믿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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