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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Aug 18. 2023

누구나 시 하나쯤 가슴에 품고 산다 1

있는 그대로 충분하다

큰돈 들이지 않고 행복해질 수 있는 것들, 눈이 그렇다. 부탄에서는 첫눈 오는 날이 국경일이란다. 첫눈 오는 날 만나자는 우정과 사랑의 약속처럼, 부탄 정부와 국민이 한 약속이다. 고산의 건조한 땅에 내리는 눈은 식수가 되고, 농수가 되는 귀한 물이 된다. 눈이 오면 농부들은 싱싱한 채소를 거둘 수 있게 되었다며 좋아한다. 그런 농부들의 기쁨을 함께 나누자는 뜻에서 국경일로 정했다고 한다. 경제 총생산량보다 행복 총생산량을 늘리는 것이 목표인 나라 부탄.

눈이 내리면 시간은 따스하고 느리게 흐른다. 그리고 누구나 눈에 얽힌 설담 몇 개쯤은 갖고 있다. 지리산 스님이 들려준 이야기다.


스님은 지리산 자락에 있는 방 하나 부엌 하나인 암자에서 수 년째 홀로 수행 중인데, 눈이 오면 암자로 통하는 길이 끊어져서 겨울에 며칠씩 암자에 갇히는 일은 이제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자연스러웠던 것은 아니다.


스님이 버려진 암자에 와서 처음 맞은 겨울의 일이다. 양식이 떨어지 고 눈이 내리기 시작하자 스님은 산 아래로 내려가 겨울을 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간단한 짐을 챙겨 어깨에 메고 눈 덮인 산길을 내려가는데 그새 눈이 쌓여 그만 길이 사라지고 말았다. 사방이 흰 눈밭인데 이미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눈발은 약해졌지만 온몸이 얼어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 싶 었다. 더럭 불안감이 몰려와 필사적으로 길을 더듬어 내려가다 다리가 눈 속에 푹 빠지는가 싶더니 그대로 고꾸라졌다. 체념하고 눈위에 벌러덩 누워있는데, 멀리 불빛 하나가 반짝였다.


스님은 벌떡 일어나 빛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땀이 비 오듯 했다. 마침내 시야에 집이 들어오는 순간, 스님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외딴 민가라고 생각했던 그 불빛은 스님이 오후 나절 떠나온 암자였기 때문이다. 노란 창호지 불빛에 스님의 얼굴이 따뜻하게 물들었다. 스님이 지금까지 토굴 수행을 멈추지 않은 건 그날의 불빛에서 흘러나온 어떤 힘이 작용해서이리라.


충분하다는 것은 단지 많음이 아니다. 무르익기 위한 축적의 시간일 수도 있고 무언가를 완성하기 위한 마지막 조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순간이라도 우리가 기뻐하고 행복하다고 느낀다면 이미 모든 것은 충분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양이 아닌 어떤 상태, 추위 속에서 동료의 체온이 견딜 수 있는 힘이 되어 주 고, 어두워진 다음에야 불빛을 발견하고 멀리 갈 수 있는 힘을 구한 것처럼.


무수한 말보다 따스한 한마디로 위로를 받고, 많은 수의 친구보다 마음을 오롯이 나눌 수 있는 한 명이라도 있으면 우리는 충분하다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충분하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면 일상에서 나만의 기쁨을 만들어 가는 조건들에 대해 좀 더 너 그러울 수 있지 않을까.


알래스카 원주민 이누이트 족의 토착어에는 '훌륭한'이란 단어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훌륭한 사냥꾼도 없고 훌륭한 남자도 없고 훌륭한 여자도 훌륭한 인간도 없다. 우리는 존재하므로 살아간다. 시시한 인생도 훌륭한 인생도 없다. 세상은 지금 나의 존재만으로 충분하다. 이론 물리학자인 로렌스 크라우스는 말했다.


"목적이 없는 우주에서 산다는 것은 정말로 놀랍고도 신명나는 일이다. 우주에 아무런 목적이 없었기 때문에 우연히 탄생한 생명과 의식이 더욱 값지게 느껴진다. 이 가치가 얼마나 지속될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태양이 살아 있는 동안은 결코 퇴색하지 않을 것이다."


지나치게 훌륭해지려는 노력들이 우리를 상심에 빠트리고 아프게 한다. 더 이상 훌륭해지려고 너무 애쓰지 말라. 그럼에도 자꾸만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다면 틱낫한 스님의 말을 기억하라.


"한 송이 꽃은 남에게 봉사하기 위해 무언가를 할 필요가 없다. 오직 꽃이기만 하면 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한 사람의 존재는 만일 그가 진정한 인간이라면 온 세상을 기쁘게 하기에 충분하다."


있는 그대로 충분하다는 말, 참 멋지지 않은가.




30년간 글을 쓰고, 월간 '좋은생각' '문학사상' 등의 책을 두루 만들었고, 20만 독자가 선택한 <서른 살엔 미처 몰랐던 것들>과 40만부 베스트셀러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를 쓴 출판 에디터 김선경이 엮은 시집 [누구나 시 하나쯤 가슴에 품고 산다]에 나오는 글이다.


김선경이란 이름과 시 중간중간 나오는 글이 왠지 낯익다 했더니, 내가 27년째 정기구독하고 있는 '좋은생각'의 편집자였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으나 단지 책이 좋아 사장 부부와 직원 두 명인 잡지사에 자리를 얻고, 넷이서 시작한 잡지가 월 발행부수 수 백만부를 돌파할 때까지 열심히 책을 만들었다는 작가소개를 보고 알았다.


달마다 다섯 편의 시를 잡지에 싣기 위해 심마니의 심정으로 시를 찾아 읽고 고르면서 마음 돌보는 법을 배웠다는 김선경. 삶의 고단함이야 서로 뻔히 아는 것. 나는 이렇게 살아왔노라 대신 나는 이런 시를 읽어왔다고 고백한다면 좀 멋지지 않을까? 하고 말하는 그녀가 엮은 이 시집의 시들은 한 편 한 편이 참 보물같다. 읽다가 좋은 시들을 하루 한 편씩 필사하고 있는데 오늘 필사한 시는 마침 내가 좋아하는 나희덕 시인의 시다. 이 시보다 나중에 읽은 김선경 작가의 글에 나온 지리산 스님의 이야기와 겹쳐지는 부분이 있어 다시 꺼내어 본다.



< 산속에서 >


길을 잃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리라

터덜거리며 걸어간 길 끝에

멀리서 밝혀져오는 불빛의 따뜻함을


막무가내의 어둠속에서

누군가 맞잡을 손이 있다는 것이

인간에 대한 얼마나 새로운 발견인지


산속에서 밤을 맞아본사람은 알리라

그 산에 갇힌 작은 지붕들이

거대한 산줄기보다

얼마나 큰 힘으로 어깨를 감싸주는지


먼 곳의 불빛은

나그네를 쉬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걸어갈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 나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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