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글을 처음 배운 할머니들의 책이 몇 권 세상에 나왔는데요,(어느 멋진 날/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 <엄마의 꽃시>는 교육부와 국가평생교육진흥원이 주관한 '전국 성인문해교육 시화전'에서 수상한 작품들 가운데 100편을 김용택 시인이 각각의 시에 생각을 덧붙여 엮고 글을 보탠 시집이랍니다.
평생을 까막눈으로 살다 뒤늦게 한글을 배우고 인생을 다시 시작한 할머니들의 시 한 편 한 편이 주는 감동과 울림이 크게 다가옵니다. 또한 시와 한데 어우러지는 서양화가 금동원 화백의 그림은 '색채의 화가'로 불리는 작품답게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해줍니다.
글을 쓴 할머니들은 가난해서, 여자는 학교 가는 거 아니라 해서, 죽어라 일만 하다가 배움의 기회를 놓쳤지요. 이름 석 자도 못 써보고 살다 가는 줄 알았는데, 황혼녘에 글공부를 시작하고부터 그동안 못 배운 한이 시가 되어 꽃으로 피어났습니다.
손도 굳고, 눈도 귀도 어둡지만, 배우고 익히다 보니 이제 연필 끝에서 시가 나오며 시인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여기 네 편의 시를 소개합니다.
< 친구 >
오늘은 한글 공부 하는 날
선생님과 친구들의 웃음소리로 시끌벅적해지네
저녁을 저년이라 쓰고 호호호
참새를 촉새라 쓰고 하하하
고사리를 고살리라 쓰고 히히히
옆구리를 개구리로 쓰고 헤헤헤
너도 틀렸냐? 나도 틀렸다
우리 모두 틀렸으니 친구 맞구나
- 김예순
< 희망 >
식탁 위에 놓인
숫가락은 '9'요
젖가락은 '11'이다.
동그란 국그릇은 ㅇ이고
네모난 접시는 ㅁ이다
ㄱ, ㄴ, ㄷ, ㄹ을 외우며 밥상을 차리고
ㅏㅑ.ㅓㅕ를 외우며 설겆이를 한다
좀 늦으면 어떻고
더디 가면 어떠니
칠순에 시작한 한글 공부, 숫자 공부
이만하면 훌륭하지
울퉁불퉁 삐뚤빼들 그래도 나는 신난다
시작이 반이라 하지만
나의 시작은 반이 아닌 희망이다.
- 이효령
이런 시를 읽으면 그렇게 유쾌, 통쾌, 상쾌할 수 없습니다. 시작이 반이 아니라 희망이라는 말은 또 얼마나 값진 말입니까? 공부가 취직이 되는 세상에서, 공부가 희망이 된다는 것을 이효령 할머니의 시를 읽으면서 가슴 벅차게 깨닫습니다. 시는 우리가 잊어버린 어떤 것의 본질을 알려주기도 합니다.
< 손자 선생님 >
복지관에서 배운 한글을 복습할 때
손자 녀석 지가 선생님이고
나를 학생이라고 받아쓰기를 시킨다
좀 더 나은 점수를 받기 위해
'호' 자를 쓸 때 '오' 위에
혹이 있나 없나를 물어보고
'설' 자 적을 때는 서울이라는
'서' 자 밑에 꼬불꼬불한 것 붙니?
하고 물어보면 손자 녀석은
손뼉 치고 웃으면서
며느리한테 고자질하러 간다
그 대답만 해주면
난 백점 받을 수 있었을 텐데......
고약한 녀석!
- 배영순
겉으로는 고약한 녀석이라고 손주 흉을 보지만 마음으로는 손뼉 치고 달려가는 손주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볼 배영순 할머니의 행복한 미소를 짐작하게 해주는 시도 있는가 하면,
< 무서운 손자 >
어릴 적
할머니 다리에 누워
옛날 얘기를 들으며
잠이 들곤 했었는데
우리 손주는
책을 가져와
읽어달라고 하니
무서워 죽겠다
말로 하는 이야기라면
손으로 하는 음식이라면
손주놈이 해달라는 대로
해줄 수 있으련만
달려가 보듬어 안고파도
손주놈 손에 들린
동화책이 무서워
부엌에서 나가질 못한다
- 강춘자
아는 것이 힘이 되어 무서운 것을 떨치게 해준 강춘자 할머니의 시는 읽다 보면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이처럼 할머니들의 시는 틀에 갇히지 않아 재기 발랄하고, 표현이 삶처럼 생생합니다. 독자를 울리고 웃음 짓게 하는 가운데 세상을 오래 살아본 사람만이 줄 수 있는 노년의 통찰이 무뎌진 가슴을 찌르고, 멍한 머리에 죽비를 때립니다.
- 말그미의 책레시피
우리들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하는 시, 용기를 주는 시, 다시 희망으로 살아가게 하는 시를 읽고자 한다면 '엄마의 꽃시'를 펼쳐보세요. 이 땅의 아들 딸들에게 주는 엄마의 선물같은시집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