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탐험이라 가정한다면, 내 삶의 근거지로 쓰는 베이스캠프는 무엇일지, 혹은 누구일지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문정희 시인은 그 누구를 바로 이렇게 노래했다.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 되지 하고
돌아누워 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은 남자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준 남자
이 시에서 말하는 남자가 누구인지는
바로 짐작하셨을 것이다.
나와 함께 밥을 가장 많이 먹은 남자이자,
나와 가장 많은 전쟁을 치른 남자,
그의 이름은 바로 남편이다.
어떤 할머니께서 평생 까막눈으로 사시다
한글을 배우시게 되었다.
'남편'이란 단어를 배우고 글로 쓰시던 날
선생님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고집스럽게 쓰신 단어가 '내편'이었다고 한다.
"이 세상에 유일한 내 편이 남편인데,
왜 내 편을 '남 편'이라고 써?"
할머니가 고집을 부리신 이유였다.
흔치 않은 경우이지만, 그 할머니는 아마도
할아버지랑 평생 잉꼬부부셨던 모양이다.
남편이 남편인 이유는많은 경우 '내 편'보다는 '남 편'을많이 드니까 그렇다고우리 여자들끼리 우스개로 말하곤 하지만,대체로 '남 편'이다가결정적인 순간에 '내 편'이 되는 남자.바로 이 남편이 '내 인생의베이스캠프'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나이 40을 넘은 어느 순간부터서서히 들기 시작했다.
내 남편은 어떤 사람일까?
내가 입을 쩍 벌리고 하품하면
입 속에다 얼른 손가락을 넣었다 빼며 브이를 하고,
무심결에 찍힌 내굴욕사진을 희희낙락 공유하고,
아이들 주려고 사둔 과자나 음식을 홀랑 털어먹고는 나 몰라라~ 모르쇠모드로 일관해 미운털 증식을 수시로 하기도 하지만
내가 아플 때면누구보다 먼저
이마에 손을 짚어보며 걱정해 주고,
따스한 손으로 아프다는 곳을 어루만져주고,
괜찮다고 해도 기어이 병원에 데려가는 남자.
이불 걷어차고 자면 감기 걸린다며 꼭꼭 이불 덮어주고, 땀이라도 흘릴라치면 수건으로 땀을 훔쳐주고,밖에 돌아다니다 추워~ 하면 옷을 벗어주거나 장갑을 벗어서 주는 남자.
마눌이 뭘 보고 싶다고 하면 어떻게든 보여주고,
아, 저거 멋지다! 하면 급히 달리던 차를 멈추고
내가 사진을 찍을 수 있게 기다려주는 남자.
욕실에서 씻고 있으면 빼꼼히 문을 열고는
등 밀어줄까? 하면서 사심 가득한 미소를 짓고,
호시탐탐 어떻게 하면 마누라를 만져볼까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바라보는 남자.
세상에 쎄고 쎈 게 젊고 이쁜 여자인데
결혼하고 25년이 흐르는 동안
딴 여자한테 곁눈질 한 번 하지 않은 남자.
남들 보는 데선 손도 안 잡고 멀찍이 떨어져 걷지만,
우리만 있을 땐 잠시도 내 곁을 비우지 않는 남자.
나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본래의 나보다 더 높이 평가하고,
누구보다 깊이 나를 헤아려주는 남자.
때론 무시하고, 욱해서 성질낼 때도 있지만
결국엔 미안하다면서 용서를 빌고
뜨거운 키스를 퍼붓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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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가택연금 상태에 있던 미얀마의 아웅산 수치여사는 영국에 남편과 아들이 있었다.가택연금 25년 동안 만나지 못한 채 떨어져 지내던 남편을 수치여사가 가장 그리워했던 순간은 자신의 차가운 발을 따스한 손으로 어루만져주던 남편의 손길이 떠오를 때였다고 한다.
누군가를 내 인생에 꼭 필요한 베이스캠프 같은 존재로 느끼게 만드는 건 바로 이런 사소한것들이 아닐까?
모든 희로애락의 시간을 겪으면서도 결국엔 이 남자가 내 남자구나 하고 여기게 만드는 것은 따사로운 손길 그 하나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새벽에 책읽고 글쓰다 갑자기 한기가 들어차가운 몸으로 침대에 누운 남편의 품에 파고들면, 아무리 깊은 잠에 들어서도 따뜻이 안아주는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