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말그미 Nov 06. 2020

고구마의 우엉 대변신

입이 무거워서~

오전 일찌감치 손수레를 끌고 나갔다 오신 어머님께서 주방에서 뭔가를 철수세미로 닦고 계셨다.

"뭐예요, 어머님? 초록물이 막 나오네요?"

"우엉이다."

"와~ 우엉 껍질을 철수세미로 닦으니까 이렇게 깨끗하게 벗겨지네요. 맨날 감자 껍질 깎는 칼로 벗겼는데~"

"그걸로 깎으면 살이 많이 쓸려나간께 이렇게 하면 덜 깎여나가잖냐~ 하기도 쉽고."

"그러네요~ 그런데 어디서 나신 거예요?"

"지난 번 고구마 샀던 집에서 주시더라~ 그 분이 나보다 나이가 좀 많으셔서 내가 언니라 부르거든. 요기 본토박이시라 땅이 있어서 쭉 농사를 지으시는데 고구마농사를 많이 지으셨다길래, 좀 팔아드려야겠다 하고 두 박스를 샀는데 금방 썩지 뭐냐. 그래도 썩었단 말하면 기분이 안 좋으실 것 같아 아무 말 안 하고 가만 있었지. 그란디 다른 사람들은 고구마 썩었다고 전화해서 바꿔달라고 난리들을 쳤다는구나. 언니 생각에 아이구 이 동생은 워낙 점잖아서 아무 말도 안 하고 있구나~ 하시곤 고구마 썩은 줄 다 알고 있었다시면서 미안하고 고마워서 그런다고 감이랑 우엉을 이렇게 주시더라."

텃밭을 하긴 하지만 고양이 이마만큼 좁은 땅(분양받기는 5평이지만 실제론 3~4평 될까?)이어서 계절별로 제철 작물을 고만고만 심어서 그때그때 수확해 우리도 먹고 많으면 주변에도 나누는 편이다. 어머님께서 고구마를 좋아하시는지라 매년 심고 가꾸는 게 고구마인데, 늘 들이는 공에 비해 작황이 안 좋은 게 또 고구마이기도 하다. 작년엔 특히나 밑이 들기 시작하는 늦여름부터 가을 사이에 신경을 좀 못 써주었더니, 고구마순은 엄청 잘 따먹었는데 정작 고구마는 텃밭해온 4년간 최저수확량을 기록해버렸다.

다행히 어머님께서 고구마 두 박스를 사오셨길래 올 겨울엔 이 고구마로 나면 되겠다 했다. 처음 받아왔을 땐 엄청 실하고 모양도 이쁘고 쪄먹어보니 맛도 좋았는데 이상하게 금방 썩어버렸다. 10월 중순쯤 사서 몇 번 삶아먹지도 못하고, 11월 말쯤 되니 거진 썩어버려서 12월 초에 아버님 제사에 쓸 고구마만 겨우 건졌더랬다. 그래서 아이들이 군고구마 먹고 싶다고 하면 그때마다 고구마를 조금씩 사다가 먹는 형편이었는데, 썩어버린 고구마가 감과 우엉으로 되돌아온 셈이다. 어머님의 점잖으신 성정 덕분에.

어머님이 얼마나 입이 무거우시냐면, 십년 전쯤이던가... 어머님 친구분이 옻순을 주셔서 나물을 해먹은 적이 있었다. 우리 식구 다 괜찮았는데, 어머님만 옻이 잔뜩 오르셔서 상태가 심각해 응급실까지 가서 링겔맞고 몇 시간을 누웠다 오시고, 그 뒤로도 한동안 고생을 하셨더랬다. 그때도 그 친구에게 자네가 준 옻순 먹고 옻 올라서 혼났네~ 란 말씀을 농담으로도 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나 생각하고 준 건데 그거 먹고 아팠다고 하면 얼마나 속상하겄냐? 그래서 아무 말 안 했지. 그 친구는 지금도 모르지야~"

아무리 힘들어도 평생 남한테 아쉬운 소리 하신 적 없으시고, 속이 문드러질 정도로 속상해도 조용히 속으로만 삭히시고, 남의 안 좋은 점 보여도 입 꾹 닫고 계시는 어머님께 믿고 의지하는 지인들이 많은 이유가 짐작이 간다.

부족한 점 많은 불량며느리가 어머님과 살면서 다른 분들께 칭찬 받고 사는 이유도 이때문이리라. 다 점잖으신 어머님 덕분이다. 그리고 이런 어머님을 만난 건 내 복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가랫불과 아주까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