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수시로 병원을 오가며 제한적인 생활을 하는 사이 또래 아이들은 엄마들과 온갖 경험을 하며 자라갔다. 부러웠다. 그에 비해 내 아이는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어보였다.
그것이 나를 힘들게 했다. 모두 내 탓 같았다. 부족한 엄마라는 부정적 생각이 가슴에 늘 있었다.
엄마표가 유행하면서 엄마는 선생님 역할까지 능숙하게 해야 하는 분위기였다.
심적 부담이 가중되고 옭아매는 느낌마저 들었다. 두 아이를 혼자 돌봐야하니 빨리빨리가 입에 붙었고,
숙제 봐주는 일도 밀린 집안 일 걱정에 자꾸만 서둘러야 했다. 항상 시간에 쫓겨 내 생각대로 따라오지 못하는 아이에게 잔소리를 하며 상처 주었다. 아이는 수학에 반감을 갖는 부작용까지 생겼다. 다정하게 대한다는 건 속편하고, 여유있는 사람들이나 하는 사치처럼 여겨졌다. 그나마 유일하게 함께 할 수 있었던 건, 시골에 사는 장점을 누리도록 자연 안에서 마음껏 뛰어 놀게 하는 것과 잠자기 전 도란도란 책 읽어 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어느 날 책방 선생님이 내게 물었다.
큰애를 어떻게 키웠냐고, 이 나이에 이렇게 밝고 예쁜 아이는 처음 봤다면서, 비법이 뭐냐고 했다.
있는 그대로 말했다.
방치수준이었다고. 선생님은 나처럼 훌륭한 엄마가 어디에 있냐며 용기 나는 말을 해주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해준 것 없는 초라한 엄마라고 생각했건만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선생님은 책방에 오는 아이들보면 부모한테 말 못하는 슬픔을 갖고 있는 아이들도 있다고 했다.
난 깜짝 놀랐다. 남부럽지않게 좋은 환경에 있는 아이들인데 대체 왜 그럴까.
올해 어린이 날이었다.
학교에서 타투스티커 붙여주기 행사가 있었다. 내 앞에 한 아이가 앉았다.
평소에 에너지가 넘치는 아이였다. 아이의 손을 만지며, 넌 어쩜 그렇게 활동적이고, 재미있게 놀 수 있니? 라고 묻자, 엄마가 없잖아요. 자유로우니까요... 라고 말했다.
그 말에 순간 멍해졌다. 엄마와 아이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도, 멀어도 안 좋다는 말이 이해되었다.
‘아이를 믿는 다는 것’ 이란 책은 아이에게 잔소리 안 하고, 다정하게 대하라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엄마로서 부족함을 느낄 때, 운명처럼 나타나준 책이다.
어느 한 문장이 아닌, 모든 문장들을 밑줄을 쳐야하는 내용이었다.
책 읽는 내내 머리에 경종을 울렸다.
부모는 자신의 부모 혹은 환경으로 부터 받은 상처가 두려움이 되어 내 아이에게는 경험하지 않게 하려고 미리 가상현실을 만든다.
안전한 울타리 속에 넣는다는 것이다. 나를 비롯해 주변 엄마들의 육아태도를 떠올리며 느끼는 바가 컸다.
자신의 한 맺힘을 풀려고 아이를 통해 대리 만족 하거나, 미래의 두려움을 미리 방어해 선한실패의 경험을 막는다는 글에는 무릎을 치며 공감했다. 양육의 목적은 아이의 행복이다. 하지만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아이의 마음을 물어보지 않는다. 아이들은 억눌린 감정은 풀길이 없다. 집에서 만큼은 편안해야 한다는 당연한 일이 지켜지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그 편안함을 누리며 살아온 내가 정작 내 아이들에게는 그렇지 못했음을 깊이 반성했다.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가 행복하다는 말이 있다.
나는 스스로 자책하며 행복하지 않았다. 나를 살피는 것이 먼저 되어야 했다.
책의 내용대로 실천해 보고자 노력하고 있다. 나를 놓는 연습 중이다. 나와 아이들 행복을 위해...
지난 주 일요일 책방에서였다.
한가한 음악이 흘렀다. 모처럼 나만의 시간을 즐기며 책을 읽으러 갔다.
책방 선생님과 어떤 아이가 대화를 하고 있었다. 말 소리는 음악에 묻혀 잘 들리진 않았다.
언뜻 엄마, 가족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잠시 정적이 흘러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아이는 선생님 품에 안겨 흐느껴 울고 있었다. 울움이 꽤 깊었다. 어린 아이에게서 나올 소리는 아니었다. 남의 아이도 내 아이라고 하지 않던가...
또래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예삿일이 아니었다. 나도 눈시울이 붉어져 읽던 책을 그냥 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