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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은돌 Jul 10. 2021

한국 드라마로 배우다

솟아날 구멍은 있다

'아! 이번 달은 매출도 적은데 대금 회수는 또 왜 이렇게 안 되는 거야? 돌아버리겠네.' 정말 이때를 생각하면 매출이 지독하게 안되고 있었다. 종종 베트남 직원들과 경비실 옆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나면, '오늘은 물건 실으러 차가 몇 대나 들어오나?' 경비 옆에 앉아서 세보기도 했다. 또 자금은 얼마나 빡빡한지, 내가 돈만 많이 있으면 회사에 좀 넣어주고 싶을 정도다. 특히나 이번 달이 어렵다. 얼마 전 끝난 세무조사에서 두들겨 맞은 게 있어서 더 힘든 것 같다.


며칠 동안 베트남 매니저와 자금 계획을 여러 번 돌려보고, 이리저리 궁리를 해봐도 현금 회전에 여유를 찾기 어렵다. '이번 달 대출 만기만 잘 넘기면 다음 달부턴 좀 여유가 있을 것 같은데, 은행에 연락해서 조금만 미뤄달라고 부탁해 볼까? 아니면 한국에 연락을 해볼까? 딱 이번 달만 넘기면 되는데 말이야.' 난 일이 잘 안 풀리면 자꾸 걷는다. 그렇게 하루 종일 사무실을 왔다 갔다 걷고 있는데, 스태프급의 직원들이 왜 이렇게 돌아다니냐며 심란한 일 있냐고 묻는다. "아니야 그냥 소화가 좀 안 돼서 그래."


그때, 나에게 보고할 게 있다며 매니저 한 명이 찾아왔다. 채권 잔액 문제로 다투던 거래처랑 소송한 게 있었는데, 우리가 승소했기 때문에 며칠 후면 돈이 들어온다고 한다. 이 정도 금액이면 이달 자금 걱정은 더 이상 안 해도 되겠다. '앗싸! 솟아날 구멍이 다 있다니까.' 총무 매니저 롱(Long)이 미리 연락해서 거래처가 제 날짜에 자금을 송금하겠다는 다짐까지 받아 놓았다. '완벽해.'


'근데 뭐지?' 오늘이 그 약속한 날짠데 거래처와 연락이 되지 않는다. "다시 연락해 볼래?" 롱(Long)에게 또다시 주문했다. 수차례 전화한 끝에 통화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젠 연락됐어? 뭐래?" 빨리 대답하라는 다급한 표정으로 물었다.


"오늘 은행엘 못 가서 미안하다고 내일 꼭 송금한다고 합니다." 롱(Long)이 대답한다.


"뭐야? 낮에는 계속 연락 안 받다가 은행 문 닫으니까 연락이 되네. 이거 좀 이상한데"


"그래서 아침에 OO은행에서 만나기로 했어요."


"그래 잘했어. 내일 나도 같이 갈까?"


"아닙니다. 제가 갈게요. 아! 같이 가고 싶으시면 같이 가셔도 됩니다."


"그래, 내일 출근했다가 같이 나가보자."


그리고 다음날, 분명히 지금 이 시간이 맞는데, 은행으로 오지도 않고 연락도 안되고 있다. 총무 매니저는 내 옆에서 계속 초조하게 또 전화를 돌리는 중이다.


"롱(Long)! 됐고, 그 사람 집 전화번호 알아? 집으로 연락해 봐."


"다른 직원한테 물어봐서 집으로 전화해 보겠습니다."


"아~ 이 놈 이거 뭐냐?" 정말 화가 뻗쳤다. 장난치고 있는 것 같다는 기분도 들었다.


결국, 집 전화로 연락해서 통화를 하게 되었다. 차가 고장 나서 은행엘 못 가고 있다는 말에, 잠시 후 그 거래처 사장의 집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우리가 차에 태워서 은행에 데려다줄 계획이다.


'아~ 이거 계속 이상한데, 이거 뭔가 이상해.' 이렇게 생각을 하며 차를 타고 시골길을 달리고 있다. 시골의 비포장 흙길을 한참 들어간 끝에 동네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현대식 2층 단독 주택을 마주했다. '뭐야? 이 사람 완전 부자네. 대문부터 럭셔리한 집이라고 쓰여있구먼.' 으리으리한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예쁘게 정돈된 2그루의 조경수가 있는 마당이 나오고, 그 마당을 건너 5개쯤 되는 계단을 오르면 현관을 지나 바로 응접실이 있다. 이 거래처 사장의 부인인 것 같은 여자가 나와서 짙은색 나무로 된 긴 소파에 앉으라고 손으로 표시한다.


"앉으시죠." 롱(Long)이 나에게 말을 건넨다.


"응. 이 아저씨 완전 부자네. 나무 소파에 용이 새겨져 있어. 그리고 군인이었나 봐?" 커다란 삼성 TV가 달려있는 벽 위쪽에는 군복을 입은 사진이 크게 걸려있다. 롱(Long)은 응접실에 나를 앉혀두고 주방 쪽에 있는 사장 부인에게 가서 뭔가 얘기를 하고 있다.


"뭐래?"


"사장이 차 고치러 카센터에 갔다고 합니다."


"뭐? 야, 이거 우릴 완전 호구로 보네."


"어떡할까요?"


"......"


아, 이걸 어떻게 해야 되나? 한국에선 관리 파트에서만 일해봐서 이런 일을 해본 적이 없는데, 베트남 매니저가 지금 나한테 이걸 어떻게 처리할 거냐고 묻고 있다. 여기서 그냥 나가면 정말 호구되는 것 같고, 무엇보다 이걸 해결해야 이달 자금이 문제없이 돌아간다. 그런데 어쩐담. 난 이런 일을 겪어본 적도, 배워본 적도, 또 누가 하는 걸 본 적도 없는데 말이다. 


'아니야, 잠깐만,,, 뭐 본 적이 없다고? 아니, 나 이런 장면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아. 그래, 난 이런 거 본 적이 있어. 본 적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많이 본 것 같아... 한국 드라마에서 많이 봤잖아.' 


'발라당'


난 한국 드라마에서 본 대로 기다란 나무 소파에 진짜 발라당 누워버렸다.


"롱(Long)! 저 아줌마한테 커피 가져오라고 해!" 난 큰 소리로 얘기했다.


"???" 롱(Long)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날 빤히 바라보고 있다.


"롱(Long)! 가만히 서있지 말고, 남편 올 때까지 나 안 나가니까 커피 가져오라고 해!!"


"Ah.... yes, sir!!" 갑자기 롱(Long)이 군인처럼 대답을 했다.


정말 한국 드라마는 버릴 게 하나도 없다. 난 드라마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그 장면을 그대로 재현해 냈고, 지금 이 앞에 서있는 아주머니의 반응을 회사에 유리하게 이끌어 내는 데 성공했다. 어디론가 바쁘게 전화를 걸고 있고, 많이 흥분하신 것 같다. '아싸! 성공!' 난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누워서 커피까지 얻어 마시고 시간도 꽤 지난 것 같은데, 아직도 이 거래처 사장이 안 들어온다. '아, 이걸 언제까지 기다리고 누워있어야 되나, 그냥 오늘은 이렇게 임팩트만 주고 가자. 나도 뭔가는 했으니까 안 한 것보단 나을 거야'


"롱(Long)! 여기 아줌마한테 얘기해서 내일 사장님 보고 꼭 송금하라고 하고, 우린 들어가자."


"네 알겠습니다. 좀 전에 여기 사장하고 통화했는데, 내일 돈 찾아서 회사로 오겠다고 하네요."


"아휴 난 이제 못 믿겠다. 뭔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고" 난 신발을 신은 내 발을 소파에서 내려 일어섰다.




다음날,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회계팀 매니저가 날 찾아왔다.


"오늘 세무서 들어가시는 거 알고 계시죠?"


"뭐? 아... 아! 알지." 사실은 모르고 있었지만,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1시간 후에 출발할 예정입니다."


세무조사 끝나고 마무리 미팅 후 서류에 사인하기로 한 날이었는데 잊고 있었다. 요즘 신경이 온통 자금에 쏠려있어서 깜빡한 모양이다.


세무서에 도착하니까 오토바이가 주차장에 빼곡히 줄지어 서있다. 이걸 보니 우리 회사 담당 세무 공무원이 나한테 해줬던 말이 생각났다. 그 사람은 회사에 조사하러 나갈 땐 친구한테 선물로 받은 '렉서스'를 타고, 세무서로 출근할 때는 오토바이를 탄다고 말했었다. 한국 드라마나 영화 보면 이런 장면이 있었던 것 같은데, 한국도 그게 진짜였겠구나 싶었다.


선물로 받은 '렉서스'가 있는 우리 회사 담당자는 환하게 웃으며 나를 맞는다. 오랫동안 조사받느라 수고하셨다고 오늘 잘 마무리하고 다음에 또 만나자는 얘기를 한다. 나도 애써 웃으며 앞으로 자주 만나자고 얘기해 줬다. 어쨌든 빨리 서류에 서명하고 회사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그렇게 서로 악수하고 웃으며 세무조사는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사무실로 돌아오니 직원들이 다들 호들갑이다. 나한테 베트남 말로 뭐라고 하는데 잘 알아들을 수가 없고, 의자에 앉자마자 총무 매니저 롱(Long)이 나한테 들어왔다. 어제 만나려고 했던 그 사장이 회사로 찾아왔었다고 했다.


"진짜? 아무튼 그놈이 찾아오긴 했네?"


"그게 문제가 아니라, 총을 들고 왔습니다." 롱(Long)이 손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 보이며 얘기했다.


"뭐? 총? 진짜 총?"


"네, 허리에 권총을 차고 사무실로 왔었습니다. 안 계시길 잘하셨어요. 죽인다고 사무실 막 다 돌아다녔습니다."


"......" 난 놀라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베트남에서 총이라니?


"......" 롱(Long)도 아무 말 없이 내 반응을 살핀다.


"아... 잘됐다. 돈 받을 수 있겠어." 불현듯 이게 기회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롱(Long)이 놀라는 표정으로 왜 그런지 묻는다.


"베트남 총기 소유되는 거 아니지? 그리고 우리 CCTV 있지? 그거 확인해서 녹화본 만들고 경찰에 신고하자."


"Ah~ yes, sir!"


내가 그날 아침 세무서에 안 갔다고 생각하면 아찔하다. 그렇게 만나기 싫던 세무서 공무원이 내 목숨을 살려주다니...... 물론 그 총이 가짜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회사는 CCTV 자료를 첨부하여 그 사장을 공안에 신고했고, 조사가 들어가자마자 사장은 채권 잔액을 전부 송금했다.  


"미안합니다." 롱(Long)이 나에게 와서 말을 걸었다.


"뭐가 미안해?"


"베트남 사람들한테 실망하셨죠?" 베트남엔 나쁜 사람들이 많이 있잖아요."


"아니야, 실망한 거 하나도 없어. 난 그 사람이 베트남 사람이라서 그랬다고 생각 안 해. 그냥 사람이니까 그런 거지. 한국에도 이런 사람들 많이 있어."


"한국도 이런 사람들 있나요?"


그럼 많지, 한국 드라마 보면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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