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에 온 지 반년밖에 안 됐는데, 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오자마자 세무조사를 받고, 경쟁사와 소송도 마무리 지었다. 여러 큰 사건들을 짧은 기간 동안 처리하다 보니 외국에서의 업무에도 빠르게 적응되어 가는 것 같다. 요 며칠 평범하고 일상적인 업무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오늘은 법인장이 함께 거래처를 만나보자고 한다.
우리 회사에 한국인은 나와 법인장 두 명밖에 없다. 영업 출신의 법인장은 외부 영업에 더 많은 업무 비중을 두고 있고, 관리 출신의 나는 법인 내부 관리에 집중하고 있다. 한국에선 워낙 업무가 세분화되어 있어서 본인 업무만 잘하면 됐고, 그만큼 회사 전체 업무를 파악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는데, 오늘 법인장이 함께 영업을 나가보자고 하니까 좋은 기회가 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 회사에 둘밖에 없는데, 나도 전반적인 일을 다 경험하는 게 좋겠지. 여기 베트남이 아니면 언제 영업 현장을 나가볼 수 있겠어?'
우리 회사의 영업 지역은 베트남의 시골이다. 시골로 들어가야 거래처를 만날 수 있다. 베트남 시골길은 전에도 몇 번 다녀보긴 했지만, 오늘 가는 이 길은 또 적응이 안 된다. 공장에서 자동차로 약 2시간을 달려서 만난 비포장길을 30분 정도 더 달린 뒤 우릴 기다리던 영업사원들과 만날 수 있었다. "신 짜오!(안녕하세요!)" 영업사원들과 서로 인사한 뒤 그들이 타고 온 오토바이로 갈아탔다.
영업사원 뒷자리에 앉아서
영업사원이 운전하는 오토바이 뒷자리에 앉아서 좁은 시골길을 더 들어간다. 이 좁은 길을 어찌나 빨리 달리는지 난 뒤로 넘어지지 않으려고 한 손으론 영업사원 허리를 붙잡고 있고 나머지 한 손은 오토바이 뒤쪽 짐을 싣는 은색 금속 부분을 꼭 잡고 있다. 중간중간 바나나 나무 이파리가 내 얼굴을 스쳐가고 난 이걸 피하느라 머리를 이리저리 돌리며 10분가량 앉아 있어야 했다. 그래도 오토바이가 빨리 달려서 40도에 가까운 더위를 조금이나마 식힐 수 있었다.
드디어 도착. 내가 입사한 뒤 처음으로 우리 회사의 거래처에 찾아온 날이다.
좁은 길 오른편에 있는 작은 철문으로 들어가서 오토바이를 세우자 4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베트남 부부가 반갑게 우릴 맞이한다. 법인장 말로는 이 지역에서 우리 제품을 홍보해 줄 수 있는 중간 사이즈의 거래처라고 한다. 남편은 어느 베트남 농약회사 마크가 새겨진 푸른색 반팔 폴로셔츠를 입고 있는데 목이 다 늘어나서 안에 입은 하얀 런닝이 보인다. 법인장과 악수를 한 뒤, 나에게도 거칠게 갈라진 손을 내밀며 웃으면서 악수를 건넨다.
집 마당에 있는 돌로 만든 테이블에 앉아 회사에서 가져온 선물을 꺼냈다. 사장은 우선 차 한잔 하라면서 테이블 위에 있는 주전자를 들어보더니 물이 없다고 부인에게 주전자를 흔들어댄다.
"아...... 법인장님 이 주전자로 차 따라 주는 거예요?" 너무 더러워 보이는 이 주전자 주둥이와 그냥 야외에 계속 놓여 있던 것 같은 이 소주잔 비슷한 찻잔, 그리고 법인장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어, 맞아. 베트남은 집집마다 다 차를 따라주더라고." 법인장은 아무것도 아니란 표정으로 대답한다.
"아니, 그게 아니라 너무 더럽...... 저 주전자 입구가 새까맣게 돼있어요."
"하하하, 그렇지? 저 찻잔도 그래." 어쩌면 쌤통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얘기하는 것 같이 느껴진다.
법인장과 얘기하는 사이, 부인이 빨간색 보온병에다 김이 펄펄 나는 뜨거운 물을 담아왔다. 남편인 거래처 사장은 그 물을 주전자에 넣으려고 뚜껑을 열었다. 내부에는 검붉은 빛깔의 나뭇잎과 작은 나뭇가지들이 거의 입구까지 가득 채워져 있다. 아마 며칠째 안 버리고 우려내고 있는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거래처 사장은 꼬질꼬질한 플라스틱 소쿠리 위에 거꾸로 놓여 있는, 물때가 낀 유리 찻잔을 집어 들었다. 꼭 소주잔처럼 생긴 찻잔 바닥에 뜨거운 차를 조금 따르더니 한 바퀴 휙 돌리고 나서 바닥에 차를 버린다. 그리곤 다시 차를 가득 따라서 나에게 건네며 "드시죠."라고 말한다.
"아, 네. 감사합니다."라고 대답하는 순간, 옆에 서있던 통역 직원이 날씨도 더운데 시원한 거 마시라며 355ml짜리 푸른 플라스틱 생수병을 건넨다.
'이게 무슨 일인가? 이 사람들이 나한테 왜 이러지?' 약 0.1초 동안 몇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그래, 난 오늘 그냥 영업 거래처 구경하러 한번 나온 것뿐이야. 내 원래 업무는 아니잖아? 앞으로 또 나올 일은 없을 거야.'라는 생각이 한번 지나가고, 그 생각과 동시에 '아니, 난 원래 영업도 하고 싶어 했어. 이 정도면 쉬운 거 아니야?'라는 생각도 지나갔다. '아! 이게 뭐라고. 영화 매트릭스에서 빨간약, 파란약 고르는 것 같은 느낌이 나지?'
"고마워." 통역에게 얘기했다.
"이건 이따 차에서 마실게" 그리고 거래처 사장이 주는 뜨겁고 쌉쌀한 차를 물때와 함께 한입에 완샷 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