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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은돌 Jul 21. 2021

대표가 퇴사하면 어떡하지?

그래도 또 계획을 세운다

아침에 출근하며 책상에 가방을 내려놓고 있는데, 법인장이 나를 자기 방으로 부른다. 보통은 내가 빨리 출근했는데, 오늘은 법인장이 더 일찍 나와있다.


"네."하고 바로 법인장실로 들어갔더니, 손님 접대용 테이블에 앉으라고 하며 본인은 책상에 앉아 계속 노트북 모니터를 들여다본다. 잠시간 더 뜸을 들이더니, 법인장은 프린터 위에 엎어져 있는 종이를 한 장 집어 들어 서명을 하고 나서 내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걸어온다.


"어젠 잘 주무셨어요?" 분위기를 바꿔보려 법인장에게 먼저 말을 꺼냈다.


"음,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모르겠네." 이상하게 법인장이 심각하다. 뭔가 중요한 말을 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어. 일단 이것 좀 스캔해서 파일로 보내줄래?" 법인장은 조금 전 서명한 종이를 나에게 건넨다.


글씨가 빽빽한 종이 한 장을 받아 들고 법인장실에서 나와 복합기로 걸어갔다. 걸으면서 서류의 내용을 슬쩍 보니, 영어로 뭔가 쓰여있다. '아니 이게 뭐야? 어...... 어?' 눈이 휘둥그레졌다. 입사 제안서였다. 서류 하단의 승낙자 부분에 법인장 이름이 쓰여있고 서명되어 있다. 빠르게 스캔을 한 뒤 후다닥 법인장실로 다시 들어갔다.


"법인장님, 이게 뭐예요?" 다급한 목소리로 법인장에게 물었다.


"어... 그 서류 봤지? 조금 전 한국 본사에는 통보했는데, 그렇게 됐어."


"아니, 그러니까 법인장님 지금 퇴직하시는 거예요? 그쪽 회사에 조인하는 날이 얼마 안 남았던데, 맞아요?"


"그래, 사실 그게 좀 미안하게 됐어. 봐서 알겠지만, 그쪽도 사정이 있다고 해서 말이야."


제안서 내용을 읽어보니, 동종업계의 다른 외국 회사 법인장으로 이직하는 것이었는데, 이직하는 날짜를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 최우선 조건이라고 적혀있었다. 내 입장에선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최근에 나한테 이런 내색 한번 없었는데, 바로 몇 주 후에 퇴사한다고 하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무튼 법인장은 이따 식사하러 일찍 나가서 더 얘기를 하자고 한다.


법인장실에서 나와 한국의 관련된 부서에 연락을 했다. 한국 본사도 이미 대표 이사를 통해 발칵 뒤집힌 후였다. 베트남 법인의 경영 실적이 계속 좋지 않았기 때문에 내부에서도 법인장으로 지원하고자 하는 사람을 구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회사가 이런 갑작스러운 사태를 대비해 외부에서 생각해 둔 후보자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베트남 법인이 작다고는 해도 현지 직원이 100명 이상 있는데, 당분간 한국인 관리자는 베트남에 들어온 지 1년이 조금 넘은 나 혼자만 남게 되었다.


며칠 후 한국에서 연락이 왔다. 새로운 법인장을 알아보는 중이니 확정되면 바로 보낼 예정이라고 한다. 그래도 법인에 공백이 생기면 안 되니까, 서류상 대표자 등기를 내 이름으로 해두고 있으라는 지시가 함께 있었다.


법인장이 퇴직을 통보하고 난 뒤, 약 열흘간 업무 인수인계 작업을 했다. 시간이 얼마 없었기 때문에 일단은 내가 모든 업무를 인수받은 후, 새로운 법인장에게 다시 넘겨주는 방식으로 업무를 진행하기로 했다. 이렇게 인수인계가 끝나고 법인장이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날, 베트남의 직원들과 함께 송별회를 했다. 오랫동안 함께 했던 회사의 직원들은 선물과 안부를 건넸고 또 누구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헤어지기 아쉬워하는 몇몇의 직원들과는 시내 한 호텔의 루프탑에서 밴드의 음악을 들으며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렉스 호텔 루프탑바_ 출처 Rex Hotel Saigon Website


송별회 다음날 아침, 호치민 떤선녓 국제공항에서 한국으로 들어가는 법인장을 배웅해 주었다. 그리고 회사로 돌아가는 길에 운전기사가 나에게 말을 건넨다. 법인장이 그만두었으니, 본인도 회사를 그만두어야 할 것 같다고 한다. 어차피 새로운 법인장이 올 거니까 조금만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다. 그리고 회사에 도착했더니, 이번엔 법인장과 함께 출장 다니며 통역을 했던 직원도 그만두겠다고 날 찾아왔다.


'아니, 왜 다들 그만둔다고 난리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여러 차례의 만류에도 결국 그 직원 두 명은 모두 회사를 그만뒀다. 그리고 이를 시작으로 몇 명의 직원들이 추가로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통보를 했고, 영업 사원들도 현장에서 혼란스러워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거래처에서도 회사의 정책이 변하는 것은 아닌지 확인해 달라는 요청이 온다. 직원들은 자신의 미래와 관련 있는 것이기 때문에 회사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특히 베트남은 일자리가 많은 나라이기 때문에 더 쉽게 움직이는 것 같다. 거래처도 본인들의 돈과 연관돼있다 보니, 법인장이 퇴사한 지금의 상태를 예의 주시하고 있다. 베트남 현지에서는 법인장의 부재에 따른 반응이 이렇게 구체화되고 있는데, 아직 한국에선 구체적인 후속 조치가 없는 상황이다.


일단 매니저들을 불러서 더 이상 직원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단속하라는 얘기를 한 뒤, 전체 직원을 대상으로 법인장 대행으로서 발표문을 공지했다. 또 영업 회의를 소집해서 거래처에 대한 회사의 정책 변화는 없다는 입장도 전달해 둔 상태이다. 그러고 나서 한국에 다시 연락을 했다. 도대체 언제 법인장을 보내줄 건지 알려달라고 했다. 대답은 길게 하고 있지만, 종합해 보니 결국 본사에서 보내주겠다는 법인장은 아직 확정되지 않은 것 같다.


전화를 끊고 나서 공장을 한 바퀴 걸었다. 여러 생각들이 복잡하기만 하다. 사무실로 들어가려다 다시 두세 바퀴 정도를 더 걸었다. 그리고 사무실에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본사 처분만 기다려서는 안 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롱(Long)!" 총무 매니저를 불렀다.


"네." 롱(Long)이 내 방으로 들어왔다.


"이번 주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2박 3일간 출장 계획 좀 잡아볼래?"


"거래처 만나보시려고요? 누구랑 같이 가시나요?"


"응. 거래처 만나서 얘기를 해봐야 되겠어. 너랑 같이 가려고." 기존 통역은 이미 퇴사했고, 그나마 총무 매니저가 남자라서 함께 며칠씩 출장 다니기 부담스럽지 않았다.


"저요? 저는 영업 거래처를 만나본적이 없는데요."


"내가 이전 법인장이랑 같이 만나본적이 있어. 아무튼 지금 영업사원들한테 다 연락 돌려놔. 큰 거래처 순서로 미팅 스케줄 잡아두라고 해줘."


우리 거래처는 한두 곳만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한 번의 출장으로 모든 거래처를 만날 수는 없었고, 이런 식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수개월간 긴 주말 출장을 다녀야 했다.




그리고 이제 베트남에 나온 지 더 많은 시간이 지났다. 처음 베트남에 나올 때 관리 담당 부서장으로서의 능력을 강화해보고 싶은 생각에 3년 정도 경력을 쌓을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때의 출장을 계기로-중간에 여러 사건들이 더 있었지만- 베트남 법인의 법인장이 되었고, 처음 계획과는 다른 커리어를 쌓고 있다. 


해외에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 한국에서보다 더 많은 우연과 불확실을 경험하는 것 같다. 그리고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인생은 내가 계획한 대로 살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래도 나는 또 계획을 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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