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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은돌 Jul 25. 2021

시골 저녁식사에 초대된 외국인

그래 적응할 수 있어

베트남의 시골 도로


법인장이 퇴사한 뒤 처음 잡은 고객들과의 스케줄이 너무 타이트하다. 총무 매니저 롱(Long)은 영업 거래처 방문이 처음이어서 말도 안 되는 숫자의 거래처와 약속을 잡아 두었다. 지금 생각하면 하루에 3곳을 만나는 것도 힘든 스케줄인데, 이 날 하루에 8개의 거래처와 약속을 잡아두었다. 


베트남 시골에 있는 거래처들인 데다가 거래처 간의 거리도 있는 편이어서, 오전에 3개의 거래처를 만나고 나서 점심식사를 하며 스케줄을 조정하자고 했다. 결국 3곳은 다음에 다시 약속을 잡기로 했고, 다음날의 스케줄도 재조정을 했다. 이 날 저녁은 이 지역에서 가장 큰 대리점 사장과 식사를 하기로 했는데, 원래 약속했던 시간보다 이미 1시간 정도 지체된 상황이다.


최대한 늦지 않게 도착하려고 베트남 시골의 비포장길을 덜커덩거리며 빠르게 달렸다. 이렇게 흙먼지를 날리며 도착한 곳에서 만난 인상 좋게 생기신 중년의 대리점 사장님은, 날 만나자마자 집 마당에 식사를 준비해 놨으니 식사하면서 사업 얘기를 하자고 하신다. 


대리점 사장의 안내로 걸어 들어간 집 앞마당에는 저녁식사가 준비되어 있고, 이미 몇 명이 앉아있다. 사장의 부인, 대리점에서 일하는 종업원, 그리고 이 동네의 한 은행 지점장과 이 동네에서 제일 큰 헬스장 사장이라고 소개를 해준다. 


"은행 지점장하고 헬스장 사장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총무 매니저에게 물었다.


"아마 외국 손님이 온다고 해서 친한 친구들을 불렀을 겁니다."


"아...... 그래." 베트남 시골에서 매일같이 심심하게 지내다가 외국 사람이 찾아온다니까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리점이 차려놓은 야외 테이블에는 여러 음식들이 있는데, 그중 가운데 놓여있는 닭백숙이 가장 눈에 띈다. 닭 머리랑 닭발까지 그대로 올라와있고, 염통을 비롯한 내장들도 함께 놓여 있다. '아, 좀 충격인데.' 그래도 충격 안 받은 것처럼 맛있어 보인다고 말하면서 앉았다. 다행히 그 옆에 생선 튀김은 맛있어 보인다. 또 양념된 소고기 요리도 있다. 


거래처가 대접해 준 음식


나에게 사람들을 소개해주고 나서 대리점 사장은 어디론가 시끄럽게 전화를 걸고 있다. 총무 매니저가 옆에서 통역을 해주는데, 대리점 사장은 지금 어딘가에 전화로 맥주를 더 시키고 있다고 한다. 또 노래방 기계도 배달해 달라고 얘기 중이란다.


"뭐? 맥주 많은데 또 시켜? 그리고 노래방 기계가 배달이 돼?"


"하하하. 그럼요." 총무 매니저가 날 보며 웃는다.


자리에 앉으니 대리점 사장 부인이 닭 머리를 먹어보라고 손으로 집어 나에게 건네준다. '뜨악' 난 가슴살을 더 좋아한다고 하면서 거절했다. 생각하기 전에 이미 말이 먼저 나간, 본능적으로 한 거절이었다. 그리고 가슴살을 집어다가 씹어봤는데, 엄청 질기다. 나중에 들은 얘긴데, 베트남은 오래 키운 토종닭을 좋아한다고 한다. 질긴맛으로 먹어야 제맛이라고. 그래서 이날 이후 또 다른 거래처에서는 키운 지 3년 됐다면서 날 위해 특별히 잡았다는 닭을 대접해 준 적도 있다. 그 닭은 거의 탱탱볼 수준으로 뜯어지질 않았다. 아무튼 이렇게 오래 키운 이유 때문인지 테이블에 놓여있는 닭이 더 커 보인다. 닭발을 보면 거의 인간과 악수도 가능해 보이는 정도의 크기다. 


닭가슴살을 뜯으면서 앉아 계신 분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은행 지점장은 젊잖게 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있는데, 본인이 이 동네에게 제일 큰 은행의 지점장이니까 대출이 필요하면 얘기하라고 한다. 내가 굳이 이 시골까지 와서 대출받을 일이 있을까 싶지만, 감사하다고 대답했다. 사장 부인은 요가하러 헬스장에 매일 간다고 한다. 그래서 동네서 제일 친한 사람이 옆에 앉은 헬스장의 여자 사장님이라며, 나에게 헬스장 사장님과 악수 한번 더 하라고 요청을 한다. 다시 한번 더 악수를 나눈 헬스장의 여자 사장님은 거의 가슴이 다 보일 것 같은 트레이닝복을 입고 오셔서 나에게 유독 친한 척을 하고 있다. 한국을 좋아한다고 하면서 한국어로 인사도 하고, 몇 가지 간단한 한국말도 좀 더 알려달라고 한다. 


그래서 한국어 강의를 잠깐 하고 있는데, 정문으로 오토바이가 두 대가 들어온다. 한대에는 맥주가 박스채 실려있고 나머지 한대에는 검은색 스피커가 실려있다. 블루투스로 연결 가능한 스피커인데 스마트폰과 연결해서 노래방 기계로 사용할 용도라고 한다. 크기가 거의 고등학교 때 보았던 교탁 정도는 되는 것 같다. 오토바이에서 맥주와 스피커, 그리고 마이크 두 개를 우리 자리 옆으로 내려놓은 뒤에, 오토바이를 몰고 오신 분들도 우리 테이블에 합류한다. 한분은 동네 슈퍼 주인이고, 나머지 스피커를 싣고 오신 분은 근처에 살고 있는 이웃이라고 한다. 이렇게 이 자리에는 우리 회사의 영업사원들을 포함, 1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다. 


500cc 정도 크기의 투명 플라스틱 잔에 손가락 3개 정도의 굵기가 되는 기다란 원통형 얼음을 쏙 집어넣는다. 그러고 나서 미지근한 맥주캔을 따서 컵에 붓는다. 신기하게도 맥주는 금방 시원해진다. 맥주가 조금 줄어들면, 얼음이 절반은 차지하는 컵에 계속해서 맥주를 가득 따라주며 서로 이야기하느라 바쁘다. 


컵에 넣는 얼음


그런데 문제는 이 얼음을 맨손으로 집어서 내 컵에 계속 넣어준다는 것이다. 손으로 닭고기 잡아서 뜯다가 내 잔이 비어있는 걸 보면 아이스박스에서 이 원기둥 얼음을 손으로 집어서 내 잔에 다시 채워주고 있다. 손으로 닭 뜯다가 그 손가락 빨아먹는 거 내가 다 봤는데, 너무 유난 떠는 것 같을까 봐 그냥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는 중이다. 더군다나 나에게 과도한 친절을 베풀어 주고 있어서 얼음이 잔 높이보다 조금 더 높이 올라오면, 손바닥으로 얼음 윗부분을 문질러서 녹여주기까지 하고 있다. 


그때, 대리점 사장이 갑자기 일어서더니 이렇게 얘기한다. 회사에서 새로운 한국 사장님이 오셨으니까, 최선을 다해서 우리 회사 제품을 팔아보겠다고 한다. 그리고 내 앞으로 와서 본인 잔을 가져다 대고서 외친다. "새로운 사장님! 건강하세요! 하나! 둘! 셋! 원샷!"


여기선 건배를 외칠 때 베트남어로 하나, 둘, 셋을 센다. 카운트 다운하는 것처럼. "하나! 둘! 셋! 원샷!" 나도 외쳤다. 그리고 잔을 높이 들었는데, 노란색 닭껍질이 내 잔 속의 얼음 기둥 옆면에 붙어있다. 닭발에 붙어있는 모양의 닭껍질이다. 난 닭발 먹은 적이 없는데, 아무래도 이 사람들이 닭발 뜯던 손으로 다시 얼음을 집어서 내 잔 속에 넣었나 보다. '아! 이거 떼고 먹고 싶은데...' 근데 지금 모두 우리 둘을 쳐다보며 손뼉을 치고 있다. '아 씨, 그냥 닭껍질은 안 본 걸로 하자.' 


그렇게 대리점 사장과 원샷을 하고 서로 돌아가며 노래도 몇 곡씩 불렀다.




고등학생 때 학교 앞 국밥집에서 저녁을 자주 먹었다. 나이가 많으신 아주머니가 사장님이었는데, 학생들이 오면 늦게까지 공부한다고 더 양을 많이 늘려서 주셨었다. 양도 많고 가격도 싸서 친구들과 자주 갔었는데, 한 가지 불편한 게 있었다. 가게가 작아서 테이블에서 주방이 다 보이는 곳인데, 솥을 국자로 휘휘 저은 다음에 본인이 간을 보고 다시 국자를 솥에다 넣는 것이었다. 친구들이 그렇게 좀 하지 말아 달라고 아무리 사장님한테 얘기를 해도 소용이 없다. 게다가 국그릇을 테이블에 올릴 때도 엄지 손가락이 그릇 속에 푹 담겼다가 나오기도 한다. 바로 몇 년 전 한국에서도 이렇게 뭔가 찝찝하긴 해도 너무 깔끔한 걸 요구하면 유난 떠는 것 같던 때가 있었다.


베트남에 있으면 그런 감성이 다시 생각난다. 뭔가 맘씨 좋고 친근한데, 세련되지 않은 감성. 나도 이런 느낌이 뭔지 충분히 알고 있으니까 여기서 적응하며 일할 수 있을 것 같긴 하다. 그렇게 다시 호찌민으로 돌아오는데, 이런 생각이 났다. '한국은 어느새 이렇게 세련돼 진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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